'바람의 땅' 제주에서 바람처럼 차를 몰고 떠난다. 하얗게 빛나는 억새, 샛노란 감귤, 파랗게 부서지는 파도…. 가을 제주의 화려한 색깔은 유혹을 넘어 고혹적이다. 억센 바람과 맑은 가을볕까지 어우러져 그 어느 철보다 다채로운 자태를 연출한다. 깨끗하게 잘 닦인 도로부터 교통체증에 익숙한 시야를 확 뚫어준다.
렌터카 여행은 이제 제주관광의 대세다. 짧으면 반나절, 길어도 하루면 내로라하는 드라이브코스를 만끽할 수 있다. 제주공항 근처 하귀∼애월간 도로와 세화∼성산 해안도로는 파도와 억새를 감상할 수 있는 곳이고, 성산일출봉∼성읍민속마을간 1119번 관광도로는 억새로 유명하다. 5·16 도로를 올라 한라산 산허리에 들어서면 단풍나무과 왕벚, 서어나무의 단풍터널을 지날 수 있다.
길이 넓고 쾌적하지만 곳곳에 몰래카메라가 있어 조심해야 한다. 동양렌터카 (064-711-8288)에서 드라이브패키지를 판매한다. 1일(24시간) 대여료가 40% 할인되며 감귤따기, 무료승마, 이색숙소 20% 할인혜택도 준다.
남원 신영영화박물관 인근의 별주부전(764-8899)에서 분위기있게 돼지고기를 즐겨보자. 부서지는 파도, 솔숲 향기와 함께 제주 특산 흑돼지바비큐가 익어간다. 타이타닉을 연상케 하는 배 모양으로, 스크린이 설치된 갑판에서 영화도 즐길 수 있다. 흑돼지바비큐 1인분 7,000원. 제주의 명물 오분자기(전복과 비슷한 조개류)가 들어간 해물찌개가 1만원.
별주부전 옆의 이국적인 통나무집은 '파도마을'이라는펜션. 그냥 지나쳤더라도 저녁에 돌아와 꼭 한번 묵어보고 싶은 곳이다. 침대에서 파도가 보인다. 캐나다 밴쿠버 근교에서 정통 북미형 통나무집을 벤치마킹했다. 들어서면 원목냄새가 알싸하다. 마을 주민 6명이 만든 단지로 양지통나무, 노인과바다, 파도산책 등 6개동이 있으며 20평형 복층구조. 객실료는 1박 14만원. 764-9114.
/양은경기자
부드러운 녹색으로 일상에 지친 눈을 편안하게 달래보자. 제주시에서 서부산업도로를 타고 남쪽으로 20여㎞ 달리면 와닿는 그린리조트. 몽고인들이 펼치는 마술쇼로 유명한 곳이다. 회갈색 경주마들이 날씬하고 균형잡힌 몸매를 자랑한다. 푸른 초원을 배경으로 한 선홍색 승마복도 신선하다. 샛별오름을 비롯한 3∼4개의 오름 곡선은 풍만하고 여유있는 스카이라인을 선사한다. 초원보다 한층 부드러운 연녹색이다. 매년 정월대보름 들불축제가 벌어지는 곳이기도 하다.
200여m 경사면에 억새가 빼곡하다. 바람따라 은빛 파도가 물결친다. 먹물빛 하늘 아래서 키높이의 억새가 바람을 타고 얼굴을 간지럽힌다. 옛날 영화의 한 장면처럼, 고개를 빠끔히 내밀고 '나 잡아봐라'하면 딱 어울릴 것 같다. 하지만 울타리와 가시철망이 접속을 가로막는다.
탁 트인 산록도로를 올라간다. 한라산 방향 1117번 도로. 호젓한 2차선 곳곳에서 억새가 함초롬하게 손짓한다. 내륙이지만 해발 1,000m 이상이어서 멀리 바다까지 보인다. 쪽빛 해안선에 희부옇게 운무가 끼었다. 날씨가 좋은 날은 비양도까지도 볼 수 있다. 11월까지 이어지는 갈치잡이 덕에 야경은 그림같다. 울릉도 오징어배가 만들어내는 저동어화(苧洞漁火)처럼, 환하게 불밝힌 고깃배가 몽롱하게 떠 있다. 빛을 따라 모여드는 갈치가 투명한 은빛으로 반짝거린다.
이 도로를 타고 계속 동진한다. 제주도의 길은 어디나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하다. 바람이라는 진공청소기 덕이다. 관음사 야영장을 지나 도깨비도로로 들어선다. 분명 육안으로는 오르막길인데 차가 슬금슬금 내려가서 붙여진 이름이다. 정밀하게 지표측량을 하면 경사 3도의 내리막길. 주변 지형 때문에 벌어지는 일종의 착시현상이다. 국적에 따라 반응이 다르다. 중국 사람들은 깡통을 갖고 와 굴려본다. 일본 사람들이 제일 호기심이 많다. 마치 과학자처럼 물통에 물을 담아 와 흘려보고 쏟아보며 온갖 실험을 한다. 그러나 한국 사람들의 반응은 단순하다. "그냥 가."
삼나무길의 이국적인 풍광도 놓칠 수 없다. 5·16도로를 타고 가다 1112번 길로 접어들면 그 유명한 길이 나타난다. 곧디 곧은 나무가 눈이 아릴 정도로 빽빽하게 들어서 마치 북미의 어느 삼림지역에 와 있는 듯 하다. 고색창연한 다갈색 숲 자체가 하나의 '앤티크'다. 상쾌한 나무향기가 축축한 공기를 타고 차 안으로 흘러든다. 정신을 맑게 해 준다는 삼림욕의 주성분 '피톤치드'덕일까.
교래사거리에서 남조로로 접어든다. 남쪽의 남원과 북쪽의 조천을 잇는 이 길은 최고의 억새드라이브 코스로 꼽힌다. 억새는 바람의 꽃이다. 이름처럼 '억세게' 버티지 않으면 제주 바람에 웬만한 잡초는 남아날 수도 없다.
남원의 큰엉해안산책로에서 제주에서 가장 예쁜 파도를 만난다. 프리즘을 만난 태양빛처럼, 짙푸른 바닷물이 검은 현무암을 만나 사파이어, 에머랄드, 옥색으로 산산히 부서진다. '큰엉'은 큰 바위가 바다를 집어삼킬 듯 입을 벌리고 있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
남원에서 서귀포로 가는 12번 도로에는 샛노란 감귤과 검은 돌담, 강렬한 보색의 향연이 펼쳐진다. 새카만 제주돌, 현무암을 얼기설기 쌓은 돌담이 약속이라도 한 듯 집 주변, 감귤밭, 묘 주위에도 어김없이 둘러쳐져 있다. 제주를 아는 사람들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올려도 손색없을 명물'이라고 한다. 성긴 듯 엉성해도 그 거친 바람을 술술 통과시키며 굳건히 버텨낸다. 유연하고 강하다.
탱글탱글 익어가는 밀감이 담너머로 고개를 내민다. 제주 바람이 얼마나 무서운지 아는지라 절대 담장밖으로 길게 팔을 내밀지 않는다. 두꺼운 진록색 잎에 싸여 그 색깔이 더욱 선연해 보인다. 본격적인 수확철은 11월이라 아직 붉은 기가 돌기 않은 상큼한 샛노란색. 보기만 해도 침샘을 자극한다. 담장 밑에는 노란 국화꽃이 옹기종기 피어 있다. 국화꽃과 밀감이 담장을 두고 '누가누가 빛나나'를 겨루는 듯 하다.
보다 오붓하게 '감귤드라이브'를 즐기려면 내륙을 일주하는 16번 도로가 좋다. 소요시간은 4∼5시간. 길을 물어보려 해도 사람을 찾기 힘들 정도로 한적하다. 그렇다고 함부로 감귤나무를 건드리면 안된다. 서리도 엄연한 도둑질이다. 게다가 자칫 가지가 다치면 나무가 썩어들어간다.
아직 건설중인 1115번 산록도로는 미지의 억새천국. 억새는 빛의 작품이기도 하다. 햇빛을 등지면 약간 거무죽죽한 풀더미일 뿐이지만 햇빛을 안으면 빛보다 더 눈부시다. 눈이 아프다. 굽은 길을 사이에 두고 온 천지가 억새바다다. 억새밭 한켠은 새하얀 메밀밭. 둘을 가르는 돌담 위에 올라서면 어느 곳에 눈을 둘 지 몰라 난감해진다.
저녁 무렵, 노을빛이 억새밭에 깃든다. 붉은 물결이 출렁거린다. 마음이 심란해지면서 눈이 감긴다.
/제주=양은경기자 key@ 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