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당이 대선 공약으로 헌법 90조의 국가원로 자문회의를 부활시키겠다고 발표했다. 이회창 후보가 집권할 경우 정치보복이 있을 것이라는 일각의 우려를 제도적으로 불식하겠다는 의도에서다. 헌법 90조는 "대통령의 자문에 응하는 국가원로 자문회의를 둘 수 있으며, 의장은 직전 대통령이 된다"고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 조항은 1989년 3월 '국가원로 자문회의법'이 폐지되면서 사문화했다. 한나라당이 집권, 약속대로 자문회의를 부활시킬 경우 김대중 대통령이 자동적으로 의장을 맡게 된다.■ 국가원로 자문회의는 현직 대통령과 전직 대통령사이의 갈등관계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87년 개헌 때 이 조항을 신설한 것은 전두환 당시 대통령의 강력한 희망에서 비롯됐다. 퇴임 후 입지를 생각한 전 대통령은 비록 총재직은 노태우 민정당 후보에게 이양했지만, 6·29 선언을 노 후보의 작품으로 만들 만큼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다. 국가원로 자문회의법은 의장은 국회의장에 준하는 예우를 받도록 했고, 장관급 사무총장 등 사무처 공무원을 38명까지 두도록 했다. 노태우 후보가 당선되자 노 대통령 측근인 6공 실세들 사이에서 "전 전 대통령이 상왕 노릇을 하려 한다"는 불만이 쏟아졌고, 자문회의가 눈엣가시로 등장했다.
■ 그러나 전 전 대통령은 불과 한달 반이 못돼 의장직을 사퇴한다. 88년 13대 총선을 앞두고 동생 전경환씨의 새마을 비리가 터지는 것을 시작으로 5공비리 단죄의 족쇄가 조여 왔기 때문이다. 총선을 13일 앞둔 4월13일 동생의 비리에 책임을 지고 의장직은 물론, 민정당 명예총재직 등 공직사퇴를 천명한다. 자신이 유치한 올림픽 개막식에도 참석하지 못하더니, 5공비리 청문회 열풍에 걸려 백담사로 유배된다.
■ 자문회의 부활문제가 제기된 것은 국민의 정부 후반기 때. 사사건건 충돌하던 김대중 대통령과 김영삼 전 대통령과의 관계개선을 모색해보자는 취지에서다. 자문회의 부활이 전직대통령이 부정 당하는 불행한 정치사를 마감하자는 취지인 것만은 틀림없지만, 제도보다는 현직 대통령의 의지가 더 중요하다는 말을 해 주고싶다.
/이병규 논설위원 veroic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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