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의 신참 벼슬아치들은 선배들 때문에 꽤 고생을 했다. 선배들이 얼굴에 거름을 바르게 하고, 하루 종일 음란한 이야기를 하면서 춤을 추게 했으며 술과 안주를 내도록 했다. 신참은 이 과정에서 병을 얻고 몸을 버리기도 했다. 심지어 신참의 노비는 선배 벼슬아치의 노비에게 술을 내기도 했다.유교사회 조선시대의 관리는 근엄하고 도덕적일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 면도 있었다. 선배 관리들의 짓궂은 괴롭힘이 심해 사회적 문제가 되자 조정은 이를 금지하는 명령을 내리기에 이른다.
조선 중기의 사회상을 보여주는 '각사수교'(各司受敎)가 번역됐다. 수교란 사회적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이렇게 처리하라는 방안을 담은 왕의 명령문. 경국대전(經國大典) 대전회통(大典會通)이 헌법에 해당한다면 수교는 대통령령쯤 된다. 명종1년(1546년)부터 인조14년(1636년) 사이에 내린 것으로 추정되는 수교 188조를 모은 '각사수교'는 선조 초기에 1차 편집되고 인조14년에 추록을 붙여 편찬됐다.
소장 한국사 연구자 모임 한국역사연구회 법전연구반이 10여년 작업 끝에 '수교집록'(受敎輯錄) '신보수교집록'(新補受敎輯錄)에 이어 세번째로 완역본을 낸 '각사수교'는 정제된 법조문만 실은 앞의 두 수교집과 달리 수교를 내린 배경까지 소상히 기록, 당시 사회상을 생생히 보여준다.
예를 들어 제사권을 갖는 며느리의 권한을 제한하는 52조를 뒤집어 보면 당시 맏며느리가 얼마나 막강한 권한을 행사했는지 알 수 있다. 52조에 따르면 남편도, 시부모도 죽었으니 제사권은 둘째 아들과 며느리에게 넘겨야 하는데도 맏며느리가 승계를 거부하고 대신 제사 비용 조달을 이유로 토지, 노비를 팔아치우는 등 재산권을 마음대로 행사했다. 집안의 재산을 딸이나 친정에서 들인, 성이 다른 양자에게 넘기기도 했다. 이에 따라 명종 9년(1554년)에 맏아들이 아들 없이 먼저 죽고 이어 시부모마저 죽으면 맏며느리의 재산권을 박탈하도록 했다.
132조는 일부러 재판정에 나오지 않는 것을 금지하는 조항이다. 요즘 일부 정치인들이 선거법 등을 위반하고도 법정에 나타나지 않는 것처럼 당시에도 몸이 아프다거나 집안에 큰 일이 있다는 등 갖은 핑계를 대 불출석, 고의로 재판을 방해하는 일이 비일비재했음을 역으로 보여준다. 이들은 심지어 재판관에게 허물이 있다는 식의 모함을 하면서 재판관을 기피하기도 했으며 이 때문에 길게는 30년이나 가는 송사가 있을 정도였다. 삼도득신(三度得伸·지금의 삼심제) 끝에 확정된 판결에 대해 불복하는 일도 많았다. 이에 따라 조정은 명종 8년(1553년) 소송의 기한을 정하고, 재판정에 나온 자는 승소하고 나오지 않았으면 패소하도록 하는 친착(親着) 제도를 엄격히 적용하라는 수교를 내리기도 했다.
번역작업에 참가한 이경구(李坰丘·36) 서울대 국사학과 강사는 "조선 중기는 성리학의 원리가 아직 정착되지 않았던 사회 같다"며 "'각사수교'는 성리학적 질서를 본격적으로 적용하려는 시도"로 분석했다.
/박광희기자 kh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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