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은 21일 제8차 남북장관급 회담에서 처음 핵 개발 문제에 대한 공식 입장을 밝히고 위기의식을 내비쳤다. 그러나 북한의 언급은 남북 간의 직접대화를 통해 위기국면의 돌파구를 모색하려던 우리측 기대에는 못 미쳤다. 이에 따라 파기 위기에 봉착한 제네바 핵 합의의 장래는 더욱 불투명해졌다.북한 김영남(金永南)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은 이날 정세현(丁世鉉) 남측 수석대표에게 "우리도 최근 사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며 "미국이 적대시 정책을 철회할 용의가 있다면 대화를 통해 안보 상의 우려사항을 해소할 준비가 돼있다"고 말했다. 남측이 북한 핵 개발 계획으로 야기된 위기 정세를 설명하고 제네바 합의 등 국제적 약속을 준수토록 강력히 촉구해 온 점을 감안하면 이날까지 북측의 반응은 원론적인 수준에 그친 것이다.
하지만 북측의 언급에서 안보 상의 위기감과 함께 대화의지가 감지되는 부분은 그나마 긍정적 측면으로 평가된다. 핵 개발 계획을 정면 부인하거나 미군 철수 등 기존 입장을 되풀이 하지 않은 정황도 북한의 추가 입장 표명 가능성이 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지금까지 드러난 북측의 입장은 핵 개발을 지렛대 삼아 미국과 대타협을 모색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제네바 합의의 무효화를 선언했으면서도 대화 해결 원칙을 밝힌 것은 이달 초 평양을 방문한 제임스 켈리 미 국무부 동아태담당 차관보와의 협상에서 체제인정과 평화협정 체결 등을 조건으로 일괄타결을 시도한 것과 상통하는 부분이다.
문제는 핵 개발 계획의 폐기가 선행되지 않으면 북한과 대화에 나설 수 없다는 미국의 입장이 워낙 확고하다는 데 있다. 여기에는 클린턴 행정부 때처럼 북한의 벼랑 끝 전술에 말려들지 않겠다는 부시 행정부의 대북 강경론이 자리잡고 있다. 북미 양측이 대화 해결 원칙에는 접근하고 있지만 당장 해결 실마리를 찾기 힘든 것은 이 때문이다.
북한은 일단 관망자세를 취한 뒤 한·미·일의 대응책이 마련된 뒤에야 구체적 입장을 드러낼 공산이 크다. 결국 이번 남북장관급 회담을 통해 중재자로 나선 정부측은 곤혹스러운 입장에 처하게 됐다.
/이진동기자 jayd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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