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2개월의 길지 않은 국회의장 재임 기간에 나는 취임 때 국민에게 다짐했던 약속을 지키는 데 최선을 다했다. 한국 정치의 한계를 아는 많은 이들이 지나친 포부로 받아 들였던 "날치기를 하지 않는다"는 선언도 어쨌든 지켰다. 중립적이고 공정하게 국회를 운영하려 했고, 나름대로 국회의 권위를 지키려고 노력했다.국회의장으로서 국회의 국제화와 의원 외교의 내실화에도 신경을 썼다. 봄, 가을에 주한 외교사절을 국회 의원동산에 초청해 리셉션을 가졌고 새로 부임하거나 이임하는 대사들은 꼭 따로 자리를 마련해 한국의 좋은 인상을 심어주려고 애썼다.
꼼꼼히 따져보면 국회의장 재임 기간에 나는 600명이 넘는 외국 손님을 만났다. 이 가운에는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과 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스대통령 등 국가원수 9명과 고르바초프 전 소련대통령 등이 포함됐다.
클린턴 대통령은 자유분방한 성격인 것으로 알려졌지만 내가 직접 만난 느낌으로는 매우 신중한 인물이었다. 우리 국회에서 연설할 때도 나와 얘기를 나눈 뒤 연설 직전 내 방에서 직접 원고를 수정하기도 했다. 클린턴 대통령보다 더 강한 인상을 받은 것은 부인 힐러리 여사였다. 힐러리 여사는 청와대 만찬 때 내 옆에 앉아 끊임없이 질문을 퍼부었다. 한국의 음악, 풍속, 문화 등에 관심을 보였던 다른 퍼스트레이디들과는 달리 정치 문제를 많이 물었다. 이를테면 "김일성(金日成)이 죽은 뒤 북한은 어떻게 변할 것으로 보느냐", "한국의 야당과 여당은 각종 정책면에서 어떤 차이가 있느냐" 등이 질문의 주된 내용이었다.
미테랑 대통령의 인상도 깊었다. 나는 그와 만나기 열흘 전부터 간단한 프랑스어 인사말을 배웠다. 국회 현관과 응접실에서 프랑스어로 인사를 주고 받았는데 미테랑 대통령은 이에 상당한 감명을 받은 듯했다. 그는 국회 연설 도중에 원고에 없는 얘기를 꺼냈다. "오늘 이만섭 의장이 프랑스어로 인사를 하며 나를 맞아준 데 대해 감사 드립니다. 양국 학생들이 서로의 언어를 배우는 것이 문화교류의 시작입니다. 나도 돌아가면 힘들더라도 한국어를 공부하겠습니다."
우리나라 3부 요인 가운데 처음으로 중국을 공식 방문한 일도 잊을 수 없다. 1994년 1월6일 나는 차오스(喬石) 전인대 상무위원장의 초청으로 6박7일간 중국을 방문했다. 이때 장쩌민(江澤民) 국가주석, 리펑(李鵬) 총리 등 중국 지도자들을 고루 만났다.
중국측의 환대는 내 마음을 따뜻하게 했다. 장쩌민 주석을 만나던 날 당 기관지 인민일보는 이를 1면 머릿기사로 보도했다. 또 덩샤오핑(鄧小平)의 장남 덩푸팡(鄧樸方)이 가족을 대표해 숙소인 조어대로 나를 찾아 오기도 했다.
장쩌민 주석과의 면담은 당초 30분으로 예정돼 있었으나 1시간 15분이나 계속됐다. 나는 그 자리에서 무엇보다 믿음을 강조했다. "병(兵·군사력), 식(食·경제력), 신(信) 가운데 신이 제일이라는 공자님 말씀이 있습니다. 한국과 중국도 간담상조(肝膽相照)하는 마음으로 허심탄회하게 교류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장쩌민 주석은 내 말에 "전적으로 옳은 말씀"이라고 맞장구를 쳐 주었다.
나는 경제 문제를 두고도 많은 얘기를 했다. "중국은 한국을 경제 파트너로 삼아 자동차 전자 산업분야에서 적극적 협력을 꾀한다면 두 나라 모두에 크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런 제안에 장쩌민 주석도 큰 관심을 보였다. "앞으로 한국과의 교류는 내가 직접 챙기겠습니다. 한중 양국은 땅, 인구, 1인당 GNP 등에서 차이가 많지만 중국은 한국에서 배울 게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또 내가 김영삼(金泳三) 대통령이 한국 방문을 바란다고 전하자 쾌히 승낙했다. "그 문제는 이미 시애틀 아태경제협력회의(APEC) 정상회담에서 김 대통령에게 약속한 바 있습니다. 기회가 되면 방문하겠습니다." 나의 중국 방문은 후일 리펑 총리와 차오스 상무위원장이 방한하는 계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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