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11월 21일 서울 성북구 정릉동 고 김두한(金斗漢)의 빈소를 찾은 의정부 성신고아원 황금일 원장은 고인의 검약상에 깜짝 놀랐다. 대지 20평 남짓한 초라한 주택도 그렇거니와, 가구며 세간살이 어느 것 하나 백야 김좌진(金佐鎭) 장군의 아들이며 2선 국회의원 출신의 유명인사답지 않게 초라했던 것이다. 독립 유공자 연금증서를 통째로 고아원에 맡겨 운영비에 보태 쓰도록 한 처사로 보면 여유 있는 살림인 줄 알았는데, 생각과는 너무 달랐다.■ 이름보다 협객(俠客)이니 풍운아니 하는 관형사로 더 유명했던 김두한의 인정비화는 통쾌한 싸움 얘기만큼 널리 알려졌다. 부하들에게 용돈을 주거나 술값을 낼 때, 돈을 세어서 준 일이 없다는 그는 남의 딱한 사정을 알고는 모른 체하지 못하는 성미였다. 젊어서 춘정을 못 이겨 친구들과 유곽을 찾아가다 청계천 다리 밑 거지들을 보고 주머니를 털어 모아 그들에게 다 주고 말았다는 얘기가 대표 일화다. 자기 집 쌀독이 비었어도 부하들 굶는 것은 못 보았다.
■ 중병에 걸린 어머니 치료비 때문에 빚을 지고 만주로 팔려가게 된 여급을 구하려고, 3일간 업주들을 찾아다니며 돈을 모아 구해준 일화는 화류계의 신화로 남았다. 3대 국회의원 당선 3일 만에 대통령을 신랄하게 비판하다 국가원수 모독죄로 구속된 일과, 6대국회 시절 삼성 사카린 밀수사건 처리에 불만을 품고 국회의사당에 오물을 퍼부은 사건은 정치인 김두한의 대쪽같은 소신과 우국충정을 보여준다. 그래서 그의 얘기는 영화 소설 방송극의 단골 소재였다.
■ 그 얘기를 재탕한 TV 드라마 '야인시대'가 선풍을 일으키고 있다. 술집과 사무실, 교실과 길거리의 화제는 온통 김두한 주먹질의 통쾌함이다. 시청률 50%라는 보도가 과장이 아님을 알겠다. 제일 재미있는 것은 싸움과 불구경이라 한다. 그러나 아무리 재미있는 싸움이라 해도 왜 하필 지금인가. 의리를 목숨처럼 여기고 치사하지 않은 진짜 협객 스토리가 난장판 정치에 절망한 사람들을 위로해 주기 때문이다. 김두한에게 진 구마적이 깨끗이 패배를 인정하고 조용히 물러가는 모습도 다시 보여주고 싶은 사람이 많다.
/문창재 논설위원실장 cjmo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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