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정부가 1994년의 제네바 핵합의 파기를 결정했다는 뉴욕 타임스의 보도는 공식 확인되고 있지 않지만 이는 미국이 현단계에서 택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를 빼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북한이 핵합의의 정신을 깨고 우라늄 핵 프로그램을 가동하는 중대한 위반을 한 이상 미국과 국제사회가 북한에 제공해 온 최대한의 선물을 거둬들이겠다는 것이다.
제네바 핵합의 파기와 관련해 미국이 취할 수 있는 조치는 크게 두 가지다. 경수로 완공 때까지 약속한 연간 50만톤의 중유 공급을 중지하고, 한국과 일본을 비롯해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 당사국에 경수로 건설 중단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 경우 북한은 미국의 경제 지원과 경제 회생의 견인차 역할을 할 발전시설을 동시에 잃게 되는 셈이다.
미 정부는 현재까지 제네바 핵 합의의 파기를 명시적으로 선언하지는 않았다. 뉴욕 타임스의 보도이후 콜린 파월 국무장관이 "제네바 핵합의가 무효화된 것으로 본다"고만 밝혔을 뿐 공식적인 반응은 여전히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는 범주를 벗어나지 않고 있다.
하지만 북한의 핵개발 시인으로 핵동결을 약속한 제네바 핵합의는 이미 폐기된 것과 다를 바 없다고 미국은 내부적으로 판단할 수는 있다. 북한도 제임스 켈리 대북 특사의 방북 때 그렇게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은 이미 내부적으로 파기를 결정한 상태에서 한국과 일본 등 당사국을 설득하는 수순을 밟고 있을 가능성은 있다.
사실 조지 W 부시 정부의 출범과 함께 제네바 핵합의의 수정이나 파기는 어느 정도 예견돼 왔다. 제네바 핵합의를 한반도 핵위기를 해소한 성과로 여기는 빌 클린턴 전 정부와는 달리 부시 정부는 핵합의 대한 비판을 대북 정책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설령 미국이 핵합의 파기를 결정했다 해도 이것이 곧바로 중유 공급이나 경수로 건설 중단으로 이어질 것으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미국이 파기 결정을 실행에 옮기는 순간 제네바 합의의 큰 틀을 기반으로 이뤄온 한반도의 안정과 남북 관계, 북미 관계의 진전이 일시에 무위로 돌아가 버리기 때문이다. 이는 KEDO 참여를 통해 한반도 문제에서의 입지를 키워 온 일본이나, 경제 발전을 위해 한반도 안정을 우선시하는 중국과 러시아에도 바람직한 상황이 아니다. 전문가들은 미국이 북한의 핵 개발을 저지하기 위한 최고의 압박 수단으로 핵합의 파기를 활용한 뒤 북한의 태도 변화에 따라 그 강도를 조절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워싱턴=김승일특파원 ksi8101@hk.co.kr
■ 美, 중유지원 현황
미국이 제네바 기본합의에 규정된 중유 50만톤의 대북 지원을 중단할 경우 당장 올해 분부터 영향을 줄 수 있다. 미 정부는 올해 분 9,050만 달러의 예산을 확보, 집행중이지만 아직 일부 중유를 북한에 전해주지 못했다. 미국은 제네바합의 다음해인 1995년부터 지난해까지 매년 중유를 제공하느라 총 2억 9,330만 달러를 지출했다. 95년 당시 550만 달러에 불과하던 중유 비용은 유가 및 수송비 인상 등으로 올해에는 9,000만 달러를 넘어섰다. 비용 증가로 미 의회는 몇 해 전부터 미 행정부가 북한의 핵 합의 이행을 인증해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었고, 올해 부시 행정부는 인증을 유보하는 편법을 동원, 예산을 확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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