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 복이 없다고 투덜대던 청년시절, 일연(1206∼1289)은 나의 스승으로 당당히 위치하기 시작했다. 어허, 우리나라에도 이런 인물이 있었다고? 스승은 서양바람 속에서 헤매던 세월에 일단락을 짓고, 새로운 시대를 펼치게 독촉했다. 아무리 조선 유생들이, 일제 관학자들이 폄하해도 진가는 변하지 않고 있었다. 민족문화의 보물창고였다. 역사적 사실과 함께 문학적 상상력을 무차별로 제공했다. 음미할수록 맛이 새로웠다. 그렇다. '삼국유사'는 역사를, 민족을, 불교를 그리고 문화예술을 알게 했다. 그 가르침의 폭과 깊이가 너무나 커 따라가기가 바쁠 정도였다.내가 대학에 입학한 1970년대 초는 미술하면 으레 서양미술이었다. 하지만 대학에서 서양미술만 접한 나는 "이게 아니다"는 생각에 빠졌고 우리미술로 관심을 돌렸다. 그리고 우리미술이 집대성된 사찰을 돌아다녔는데 명찰마다 '삼국유사'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는 식의 이야기가 전해졌다. '삼국유사'는 그렇게 해서 읽었다.
'삼국유사'는 스승께서 국존(國尊)으로 책봉된 고려 충렬왕 9년(1283), 그리고 인각사에서 주석하기 시작한 해(1284)로부터 83세로 세상을 떠난 해(1289)까지의 언저리에 저술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현존 판본은 조선 중종(1512)때 경주에서 판각한 이른바 정덕 임신본(正德 壬申本)이 모본으로 돼 있다. 이 책은 정사에서 누락된 기록으로 진가를 자랑하며 전기체의 기술방법을 택하고 있는데, 왕력(王曆) 기이(紀異) 등 아홉 편의 내용으로 꾸며져 있다. 이 가운데 탑상(塔像)편은 불교미술의 교과서와 같다. 내가 한국미술사를 전공으로 택하게 된 배경에는 탑상편의 영향이 적지 않다. 그러니 '삼국유사'는 분명 나의 인생을 움직인 한 권의 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얼마 전 스승께서 '삼국유사'를 집필했다는 대구 팔공산의 인각사를 다녀왔다. 그곳을 갈 때마다 나의 가슴은 무너진다. 역시 폐허의 썰렁한 분위기는 몸 둘 곳을 모르게 했다. 민족의 성지를 우리들은 너무나 방치하고 있다. 스승에게 면목이 없다. 일연은 나의 스승만이 아니고 우리 민족의 스승이라고 해야 맞는 말이다. '삼국유사'를 통하여 감동 받는 동지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윤범모 미술평론가 경원대 미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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