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주(daju)'. 형님을 가리키는 네팔어다.국내외 오지에서 헌신적인 선교와 봉사활동을 벌이는 선교사들에게 수여하는 제2회 언더우드 선교상 수상자로 선정된 강원희(姜元熙·66·사진)씨를 네팔 현지인들은 이렇게 부른다. 1982년부터 네팔 방글라데시 스리랑카 등 동남아 국가에서 활동해온 평신도 의료선교사인 강씨가 선교 사역을 위해 17년간 의술을 베풀면서도 인간적 감화를 먼저 강조해온 결과다.
연세대 의대를 졸업한 마흔 여덟 살의 잘 나가는 의사이자, 부친의 여섯 형제 모두 같은 길을 걷는 '의사 집안'의 외아들이었던 강씨는 82년 강원 속초에서 17년간 운영하던 병원을 그만두고 네팔로 훌쩍 떠났다. 그가 '오지의 의료선교사'로서 제2의 인생을 시작한 것은 가난한 이웃들의 삶에서 얻은 반성과 자각을 통해서다.
"속초에는 폭풍을 만난 배가 뒤집혀 선원들이 실종되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났고 그때마다 도시는 눈물바다가 되곤 했습니다. 밥상 위에 오르는 생선 한 마리에도 죽음을 무릅 쓰고 먼 바다에 나갔던 뱃사람들의 험난한 노동이, 연탄 한 장에도 지하 몇 천m까지 파고 내려가야 했던 막장 광부들의 신산한 삶이 깃들여 있다는 생각이 문득 떠오르더군요."
그렇게 해서 찾은 네팔 제2의 도시 포카라에서 강씨는 5년 간 부인과 함께 의료활동을 펼쳤다. 피가 모자라 자기 피를 직접 뽑아 네팔인에게 수혈해 주기도 하고, 청진기 하나 달랑 들고 깊은 산간을 돌아다니며 어려운 환자들을 돌봤다.
"네팔에서 최하층 계급에도 들지 못하는 사람들은 현지 의사나 간호사가 거들떠 보지도 않더군요. 무료로 상처를 치료해주고 약도 주고 하니까, 금세 거지 행색의 사람들이 몰려들었어요. 그 뒤로 시장에 나가면 사람들이 저를 보고 '다주' '다주'하면서 따르는데 가슴이 뿌듯하더군요."
강씨는 힌두교 국가인 네팔 뿐 아니라 이슬람 국가인 방글라데시, 불교 국가인 스리랑카, 다시 네팔에서 각각 4년씩 의료 봉사활동을 벌였다. 모두 기독교 선교를 금지하는 나라들이다. "왜 선교가 어려운 최빈국으로만 갔느냐"는 물음에 강씨는 "예수님도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오셨는데 당연한 일이 아니냐"고 되묻는다.
95년 네팔을 다시 찾은 강씨는 이번에는 해발 3,000m가 넘는 히말라야 산맥 기슭에 있는 돌카 병원에서 일했다. 때로는 왕진을 위해 산간 오지를 10시간씩 걸어가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던 강씨의 노력으로 돌카는 차츰 기독교 마을로 바뀌었다. "주민들을 치료해주고 정성껏 보살펴주었어요. 4년 뒤 귀국하려고 하니까 동네 유지들이 달려와 '우리에게 성경을 주세요' 하는데 정말 기쁘더군요. 오지마을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의 정성이 통했던 모양입니다."
강씨는 99년 귀국해서 개신교 병원인 안동성소병원 원장으로 지내다 6월 물러났다. 여생을 해외 선교에 바치겠다는 신념 때문이다. 그는 지금 이디오피아 수도 아디스아바바에 내년 7월 개원 예정인 150병상 규모의 명성 메디컬센터 준비 작업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는 요즘도 시간이 나면 서울 마포구 양화진 외인묘지를 찾는다고 했다. 이곳에는 1885년 한국에 들어와 제중원(濟衆院)을 세운 장로교 의료선교사 J.W.헤론, 배재학당을 세운 아펜젤러 2세, 연세대학을 세운 언더우드 박사의 부인 홀튼 여사 등 한국에 개신교를 전파한 선교자들의 묘소가 있다.
"우리는 그동안 외국 선교사들로부터 너무 많은 은혜를 입었어요. 속세의 이익만 계산했다면 이들이 뭐가 아쉬워서 동양의 외진 곳까지 왔겠어요. 이제 우리도 평생에 불과 몇 달만이라도 해외의 어려운 사람들을 섬기고 봉사해야 될 때가 된 것 아닐까요."
언더우드 선교상 시상식은 21일 오후 4시 연세대 루스채플에서 열린다.
/김영화기자 yaaho@hk.co.kr
사진 고영권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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