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핵개발계획을 시인한 데 대해 전문가들은 한반도에서의 긴장고조, 남북 및 북미·북일관계의 악화 등을 우려하면서도 북한을 비롯한 관계국의 진의가 드러날 때까지 신중히 대처할 것을 주문했다. 전문가들은 북한이 1994년 제네바 북미 핵 합의 이후에도 핵 개발계획을 진행함으로써 제네바 합의가 사실상 효력을 상실했다는 데 의견을 같이 했다. 전문가들은 또 햇볕정책으로 탄력을 받아온 한반도 주변의 화해 움직임이 답보상태에 빠져들고 살얼음판 같은 긴장상태가 계속될 것으로 전망했다. 하지만 이 같은 상황이 곧 한반도에서의 군사대결 상황을 초래하는 것은 아니며, 긴장국면을 관리하기 위해 신중하고도 정교한 대응책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박 건 영 (朴健榮) 가톨릭대 국제학부 교수
미국 정부는 북한이 최근 방북한 제임스 켈리 동아태담당 차관보에게 우라늄 농축시설을 비밀리에 가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고 밝혔다. 이는 제네바 북미기본합의의 사실상 붕괴를 의미한다.
그러나 정작 북한은 현재까지 아무런 반응이 없다. 그리고 미국의 발표 내용에도 구체적인 사실은 없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몇 가지 추론이 가능하다.
첫째, 북한이 특단의 공세적 전략을 채택했을 가능성이다. '벼랑 끝 전략'에서 한발 더 나간 초 강수 전략이다. 북한의 핵 개발 시인으로 향후 한반도 정세는 격랑에 휩싸일 것이다. 핵 개발을 인정한 것으로 알려진 강석주(姜錫柱) 외무성 제1부상은 1994년 북미 제네바 핵 합의의 서명 당사자였다. 미국의 발표가 사실이라면 북한은 쌍무협정을 일방적으로 파기하는 외교적으로 있을 수 없는 무리수를 둔 것이다.
그런데 이는 엄청난 모순어법(oxymoron)이다. 북한의 최고목표는 생존이므로 설사 그러한 핵 시설을 가동하고 있다 하더라도 당연히 감춰야 한다. 김정일(金正日) 위원장은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에게 일본인 납치를 고개 숙여 인정하고 재발방지를 약속했다. 김 위원장으로서는 그 어떤 자존심이나 정치적 이익도 북한 생존이라는 지고의 목표에 복속시킨 것이다. 그러나 핵개발 프로그램을 인정한 것은 북한이 생존을 포기했다는 말과 다름이 없다. 일본에 대한 사죄도 신실성이 없어지고, 상당한 모험으로 간주돼온 신의주 특구, 남북 철도사업의 의미도 훼손돼 버린다. 따라서 이러한 추론은 설득력이 높지 않다고 본다.
둘째, 북미협상이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으며 이의 연장선에서 북한측의 돌출발언이 해석 상의 문제와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발생했을 가능성이다. 협상 후 미국측은 대량파괴무기, 미사일, 재래식 무기, 인권 등의 문제를 북한에 제기했다고 말했다. 북한측은 켈리 특사가 오만하고 고압적인 자세를 보였다고 비판했다. 격앙된 분위기가 짐작이 간다. 아마도 북한측 인사가 "미국이 그런 식으로 나온다면 협상은 무의미하다, 그래 당신들이 갖고 온 그 서류 맞다"고 했을 수도 있다. 그랬다면 미국측은 북한의 진의를 파악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일 필요 없이 상당한 성과를 거두고 북한을 떠난 셈이다.
위의 추론이 사실과 가깝다면 부시 정부는 왜 이런 접근을 시도하고 있을까. 고이즈미 총리와 김정일 위원장의 극적인 타협 가능성이 그 배경에 있을 수 있다. 11월 중간선거도 한 자리 차지하고 있을 수 있다.
미사일방어(MD)체제 구축의 필요성과 관련하여 도널드 럼스펠드 미 국방부 장관은 북한 등이 광적이기 때문에 자신의 궤멸을 알고 있으면서도 미국에 대해 장거리 미사일을 날릴 것이라 말한 바 있다. 그렇다면 비밀시설을 미국에게 밝힌 북한의 의도는 무엇이란 말인가. 논리적인 설명이 가능한 상황이 드러날 때까지 북한의 반응과 미국의 대처를 지켜볼 일이다.
■서 동 만 (徐東晩) 상지대 교양학부 교수
남북 대화의 원상 회복과 북일 정상회담으로 개선이 기대된 북미 관계에 우려할 만한 사태가 조성되고 있다. 미 정부는 북한이 고농축 우라늄을 활용한 새로운 핵무기 개발 계획을 추진하고 있으며 지난 번 제임스 켈리 특사 방북 당시 북측이 이를 시인했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조지 W 부시 정부가 북한 핵 의혹을 제기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며 이를 북한이 시인했다는 것이 핵심적인 내용이다. 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미국의 발표이며 아직 북한이 공식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이 중요하다.
또한 부시 정부가 새롭게 제기한 북한의 핵개발 의혹 자체도 그 내용이 불확실하다. 94년 북미 제네바 핵 합의가 이뤄진 수년 후 개발을 시작했으며 아직 무기화 단계는 아니라고 미국 언론은 보도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기술적 견지에서 어떤 계획인지, 나아가 부시 정부 등장 이후 시작된 것인지 그 이전에 진행된 것인지도 불분명하다.
아직은 의혹 단계이며 북측이 공식적으로 어떤 반응을 보일지 지켜보아야 한다. 어쨌든 미 국무부는 북한이 제네바 기본합의를 위반했다고 지적했다. 북한의 시인이 사실이라면 제네바 기본합의는 물론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까지 명백하게 위반한 셈이 된다.
이번 사태는 두 가지 방향에서 지켜 볼 수밖에 없다. 우선 북한이 핵 개발 계획을 시인했다는 미국 주장을 인정하지 않는 경우이다. 그렇다면 북미 양측의 상반된 주장이 서로 평행선을 달릴 수밖에 없게 된다. 북한의 과거 핵 물질 추출 여부를 둘러싼 핵 사찰 문제가 새로운 고농축 우라늄 활용 계획에 대한 추가 의혹으로 확대된다. 다음으로 북한이 이를 그대로 인정하는 경우이다. 솔직한 시인을 통해 북한은 핵개발 포기를 전제로 그 효과를 극대화하려는 것으로 추측된다.
어떤 경우든 북미 관계는 최근 북한이 시도하고 있는 과감한 대내 개혁 및 대외 관계 개선 조치와 관련해서 전망해야 할 것이다. 북한이 북미 관계를 악화시키려는 의도를 가졌다고는 보기 어렵다. 사실 북일 정상회담에서 북한은 핵 관련 국제협약 준수를 약속했다. 북미 합의를 북일 합의로까지 확대한 것이다. 북한이 납치 사건을 전면 인정하면서까지 공을 들이고 있는 북일 관계의 개선을 위해서는 절대로 북미 관계가 악화돼서는 안 된다.
더욱이 켈리 특사 방북에서 북한은 핵사찰 전면 수용, 미사일수출 중단, 재래식 전력 감축 등 현안을 두고 '깜짝 놀랄 만한 제안'을 했다는 미확인 보도까지 나오고 있다.
따라서 관심의 초점은 북한의 공식 반응에 맞춰지고 있다. 한반도는 물론 동북아정세는 평화냐, 대립이냐의 기로에 서 있다. 여러 불확실한 사실의 확인이 이뤄져야 하지만 북한의 과감한 결단이 요청되는 시점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한국은 90년대 한반도 핵 위기 당시 북미 관계에 주도권을 빼앗긴 전철을 밟아서는 안 된다. 대북 화해협력 기조의 일관성을 견지하면서 남북대화를 지속하는 것이 대전제이다.
■서 주 석 (徐柱錫) 한국국방연구원 책임연구위원
북한 당국이 핵 개발 계획을 제임스 켈리 미 방북 특사에게 밝힌 사실이 알려지면서 파문이 커지고 있다. 오랫동안 핵 개발설을 "미국의 조작"이라고 부인해 온 북한이 매우 파격적인 방법으로 이를 시인했다는 점에서 충격과 논란이 더하다.
미 국무성과 백악관이 공식 발표를 했지만 아직 자세한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다. 켈리 특사와 회담하는 자리에서 북한의 고위당국자가 핵 개발 계획을 시인하고 더 이상 핵확산금지조약(NPT)에 얽매이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다는 게 알려진 내용의 전부이다. 북한의 핵 개발 계획이 1994년 북미 제네바 핵 합의 이후 농축우라늄을 원료로 이뤄져 왔다는 추가 정보도 있었지만 아직 확인해야 할 게 많다. 사실 확인이 급선무이며 그 결과에 따라 우리는 신중하고도 지혜롭게 대응해야 한다.
최근 북한의 획기적인 경제 개혁 조치, 9월 북일 정상회담 당시의 일본인 납치 시인 등으로 보아 북한이 북미 관계의 최대 현안인 핵 문제에서도 의외의 선택을 할 수 있다는 일부 예측은 있었다. 그러나 미국의 특별 사찰 요구가 '과거 핵'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고 '현재 핵'에 대해서는 의혹만 있는 상태에서 선뜻 이를 시인하고 나선 것은 솔직히 뜻밖이다. 행동이 파격적인 만큼 북한의 의도는 비교적 쉽게 짚어 볼 수 있다. 핵 개발을 의혹 수준이 아니라 사실로서 확인한 마당에 앞으로 개발 계획을 그대로 밀고 나갈 경우 엄청난 부정적 대응에 직면할 것임을 북한은 알고 있었다. 특히 조지 W 부시 미행정부의 성향을 고려할 때 경고나 경제 제재가 아니라 자칫하면 군사적 조치까지 부를 수 있다는 점도 이해하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북한의 파격은 특유의 과장의 결과일 수 있고, 역설적으로 협상을 겨냥한 것일 가능성도 크다.
미국 당국자는 핵 문제에서 협상은 있을 수 없다면서도 대화를 통한 문제 해결 의사를 밝혔다. 핵개발 계획의 철회만이 문제 해결의 길이라는 단호한 자세를 밝힌 것이지만 북·미 고위급회담이 재개되면 이 문제를 포함한 포괄적 논의에 나서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북한은 나름대로 '협상카드'를 새로 확보했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의 강경 자세로 보아 협상은 길고도 험난할 것이며 협상 과정에서 북한은 이 카드 이상의 선택을 강요 받게 될 것이다.
우리도 더 이상 핵 문제를 북·미 대화의 의제로만 남겨 두기는 어렵게 됐다. 북한 핵 문제는 93년 이전까지 남북 협상의 주의제였고, 그 결과로서 한반도 비핵화공동선언과 핵통제공동위원회 체제까지 탄생했다.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계기로 이 문제가 북·미 대화로 넘어갔지만 북한 핵 문제는 세계안보 차원의 관심사이자 한반도의 안전과 직결된 문제이다.
19일 열리는 제8차 남북 장관급회담에서 우리는 분명한 사실 확인을 북한에 요구해야 한다. 또 북한의 태도가 불분명할 때는 남북관계 개선 프로그램에 악영향이 미친다는 점도 단호하게 밝혀야 한다. 이를 계기로 남북이 보다 진지하게 한반도 평화를 논의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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