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T가 9월10일부터 판매중인 '맞춤형 정액요금제'는 직원들의 과도한 판촉 때문에 통신위원회로부터 경고조치를 받고, 시민단체가 반발하는 것만 빼면 전형적인 마케팅 성공사례이다.출시 1개월이 갓 지난 17일 현재 우리나라 개인 전화가입자의 3분의1 가량인 500만명이 가입했으며, KT의 정액요금제 판매를 부정적인 측면에서 관망하던 경쟁업체들도 정액요금의 인기가 예상을 넘어서자 서둘러 유사한 정액요금 상품을 내놓았다.
KT의 맞춤형 정액요금제는 당초 '죽었다가 살아난' 아이디어다. 5월 중순 경기 분당 KT본사 14층 '마케팅본부'에서는 침통한 분위기 속에 회의가 열렸다. 휴대폰의 급속한 보급으로 1997년 1,041억분이던 연간 유선전화 통화량(시내외 전화 합계)이 2001년에는 그 절반 수준인 592억분으로 떨어진 것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는 자리였다.
'야간 정액요금제', '주말 정액요금제' 등 갖가지 아이디어가 나왔고, 그 가운데는 '맞춤형 정액요금제'도 있었다. 그러나 대책회의에서 모두 폐기됐다. 준비없이 도입할 경우 엄청난 적자를 낼 가능성이 있다는 의견이 주류였다.
폐기된 아이디어를 되살린 것은 회의에 말석으로 참석했던 대리급 여자 직원인 요금전략팀 양명자(34) 전임연구원이었다. 대책회의 이후 10여일이 지난 5월30일 양 연구원이 심범섭 요금전략팀장에게 맞춤형 정액요금제의 필요성을 조목조목 설명한 이메일을 보냈고, 뾰족한 대안이 나오지 않아 고민하던 심팀장도 결단을 내렸다.
'공룡'이라는 별명이 말해 주듯이 의사결정 늦기로 유명한 KT에서 사상 초유의 결정이 내려졌다. 정액요금제 기획부터 도입을 총괄하는 23명으로 구성된 태스크포스팀장에 양 연구원이 임명됐다. 양 연구원에게 지시를 내리던 10여명의 부과장급 직원들이 정액요금제 도입이라는 목표를 위해 양 연구원의 지시를 받게 됐다.
6월초 아이디어 차원에서 채택된 정액요금제가 정책으로 구체화하는데 걸린 시간은 평소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3개월. 6월초부터 7월20일까지는 여론조사, 법률자문, 요금설계에 소요됐고 이후 9월초까지는 정통부의 인가를 받고 후발 경쟁업체의 양해를 얻어내는데 사용됐다. 이 과정에서 태스크포스를 지휘했던 양 연구원이 7월19일 출산을 위해 중도 하차하는 일도 벌어졌다.
마침내 9월초 모든 준비가 끝나고 발표일 선택만 남게 됐다. 이때 정액요금제를 성공시킨 또 하나의 아이디어가 나왔다. 흩어졌던 가족이 모이는 추석(9월21일)을 마케팅의 지렛대로 삼자는 것이었다. 명목상으로는 9월10일부터 판매를 시작했으나, 마케팅의 초점은 추석에 맞춰졌다.
4만여명의 KT직원이 고향으로 흩어져 '구전(口傳) 마케팅'에 나서기 시작한 20일부터 정액요금제 광고가 TV를 통해 쏟아지기 시작했다. 추석 때 고향에서 만난 친구와 가족을 공략하자는 전략이 그대로 맞아 떨어졌다. 추석 이전 하루 10만여명 수준이던 가입자가 추석을 지나며 30만명을 넘어서더니, 9월말에는 하루 70만명을 넘어섰다.
/조철환기자 chcho@hk.co.kr
■정액요금제 첫 제안 양 명 자 연구원
KT 마케팅본부 요금전략팀 양명자 전임연구원(대리급)은 맞춤형 정액요금 상품이 대박을 터뜨리면서 KT에서 일약 '여자 영웅'으로 떠올랐다.
정액요금제의 최초 제안자이자, 만삭의 몸으로 '정액요금 태스크포스' 팀장으로 일하던 양 연구원은 예정보다 일주일 가량 이른 7월18일 밤 산고(産苦)를 느꼈다.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그는 남편을 깨워 서울 양재동 집을 나와 곧장 분당 KT본사 14층 사무실로 향했다.
3시간에 걸친 자료 정리를 끝내고 7월19일 새벽 시댁이 있는 원주로 떠나면서 양 연구원이 심범섭 요금전략팀장에 남긴 이메일은 아직도 KT직원 사이에서 회자(膾炙)되고 있다.
"안녕하세요 팀장님. 생각보다 빨리 아기가 나올 모양입니다. 갑자기 양수가 흐르기 시작해서 원주로 가는 길입니다. 최소한 주말까지는 있어야 일을 마무리 할 수 있는데, 죄송합니다. …(중략)…관련 자료 및 주요 연락처는 따로 준비해 드리고 갑니다. 언제 어디서나 가장 소중한 마음으로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강원도 횡성이 고향인 양 연구원은 고려대 신방과 출신으로 미국 미시건주립대에서 텔레콤학 석사학위를 받은 뒤 1996년부터 KT 요금전략팀에서 근무중이다. 양 연구원은 출산휴가를 떠난 다음날인 7월20일 아들을 낳았고, 17일부터 다시 출근해 정상 근무를 하고 있다.
내년에는 회사 지원을 받아 미국 대학 박사과정에 진학할 예정인 양 연구원은 정액요금제 상품의 성공에 따라 '올해의 KT인'에 선정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KT는 8월 포상기준을 변경, 2002년부터는 '올해의 KT인' 수상자에게 1억원의 상금을 주기로 했다.
/조철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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