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5월 서울 힐튼호텔에 로버트 배로 하버드대 교수, 앤 크루거 국제통화기금(IMF) 수석부총재 등 국내·외 저명한 경제학자들이 모였다. 1997년 한국의 외환 위기 원인을 진단하고 극복 과정을 평가하는 회의를 갖기 위한 자리였다.이 회의를 마련한 사람은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초청 연구위원으로 국내에 머물고 있는 김세직(金世稙·42·사진) IMF 리서치 부문 이코노미스트. 92년부터 IMF에서 근무하다 2000년초 국내에 파견 근무를 시작하면서부터 이 작업을 기획했다. "미국에서 외환 위기를 지켜보면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실패에서 배우는데 인색하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그는 그 해 3월 참석자를 물색, 논문을 작성하는데 무려 1년의 시간을 줬다. "수박 겉 핥기식 연구가 아니라 외환 위기에 대한 연구를 완벽하게 집대성해보고 싶은 욕심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회의는 그로부터 1년 6개월 가량이 지난 10월 '한국 위기와 극복(Korean Crisis and Recovery)'라는 한 권의 책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논문을 수정하고 토의내용을 재정리하는 데도 엄청난 시간이 투입된 탓이다. 어느 일방이 아니라 국내외 학자들이 공동으로 참여해 균형적 시각으로 접근하는데 주력하고, IMF와 KIEP가 공동으로 한국에서 책을 출간했다는데 그는 굉장한 자부심을 드러냈다.
책에서 학자들은 한국 외환 위기의 원인을 '외부 충격에 의해 곪아 터진 구조적 문제'로 진단한다. 대마불사(大馬不死)의 신화를 깨뜨리고 기업과 금융 부문의 구조조정이 강도 높게 진행된 위기 극복 과정에 대한 평가도 비교적 긍정적이다. 하지만 학자들은 "아직도 갈 길은 멀다"고 입을 모은다.
김 연구위원은 이번 연구가 주는 시사점에 대해 "외형 지표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라고 한마디로 말한다. 그는 "한 국가의 경제 위기를 보려면 거시경제 지표가 아니라 기저에 깔려있는 구조, 특히 기업의 생산성과 경쟁력 등을 봐야 한다"며 "정부가 무리하게 경기 부양을 할 경우 거시 지표는 개선될 수 있지만 구조는 오히려 악화할 수 있다"고 말했다.
3년 여에 걸친 땀의 성과물인 이 책은 국내에 2,000부, 세계각국에 5,000부 등 총 7,000부만 한정 배포될 계획. 내년 1월 파견 근무를 마치고 IMF로 돌아가는 그는 "한국에서 근무하는 동안 쏟아 부은 노력의 결실이 우리나라를 비롯한 전 세계 국가들의 위기 재발을 막는데 큰 도움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영태기자 yt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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