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워싱턴 일대가 죽음의 공포에 휩싸여 있다.얼굴 없는 스나이퍼(저격수)의 총질에 2주일 사이 9명이 숨지고 2명이 부상했다. 도시 전체가 불안의 그림자를 덮어 쓴 듯하다. 1년 전 9·11 테러라는 미증유의 사태를 경험한 미국인들이지만 언제 어디서 날아올지 모르는 한 발의 총탄에 대한 두려움은 그때의 공포 수준을 넘어선 느낌이다.
"나도 언제 당할지 모른다"는 위기감은 주민들의 생활 양태를 뒤바꿔 놓았다. 쇼핑센터 주차장에서 주위를 살피는 사람을 목격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운전자들은 먼 데 있는 주유소로 찾아가 기름을 넣는다. 학부모는 아이들의 등하교에 엄청난 불안을 느끼고 있다.
14일 연쇄 저격 사건의 9번째 희생자가 된 린다 프랭클린(47). 두 아이의 어머니이자 연방수사국(FBI) 요원인 그녀는 새로 마련한 집으로 이사할 기대에 부풀어 주택수리용품점을 찾았다. 그러나 수술로 유방암까지 이겨낸 삶에 대한 의지는 결국 한 발의 총탄에 스러지고 말았다.
그녀가 쓰러진 뒤 45분이 지난 밤 10시 캘리포니아 공군기지에서 발사된 미사일이 태평양 상공을 날았다. 정확히 28분 뒤 이 미사일은 태평양의 한 섬에서 쏘아 올린 요격미사일에 격추됐다. 조지 W 부시 정부가 야심차게 추진하고 있는 미사일방어(MD) 실험이 성공하는 순간이었다. 미국의 MD 구축 명분은 예기치 않은 핵무기 공격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한다는 데 있다.
하지만 이번 저격 사건은 과연 미국의 적은 누구이며 어디에 있는가 하는 근본적인 물음을 던진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점포 안으로 뛰어드는 것 같았어요." 린다가 쓰러지는 현장을 목격했던 사람들은 공포의 순간을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지금 미국은 불량국가의 미사일이 아니라 내부의 적이 쏘아대는 한 발의 총탄에 떨고 있다.
김승일 워싱턴특파원 ksi8101@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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