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칠레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이 큰 고비를 넘어 타결이 임박한 분위기다. 사과·배 등 농산물 개방을 둘러싼 양측의 이견이 상당히 해소된 만큼 협상 타결에 큰 어려움은 없으리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정부가 임기내 타결을 목표로 강한 의지를 갖고 있는 가운데, 칠레측이 우리측 입장을 상당부분 수용키로 함으로써 타결의 실마리가 풀렸다.
▶타결 전망과 남은 쟁점
1999년 12월 협상을 시작해 만 3년을 끌어온 협상에서 최대 쟁점은 칠레산 농산물에 대한 우리측의 개방 폭이었다. 우리측은 올 2월 미국 LA서 열린 고위급 협의에서 칠레산 농산물 개방 시 국내 피해가 가장 클 것으로 예상되는 사과와 배를 협정에서 제외하는 양허안을 칠레측에 제시했다. 포도에 대해서도 겨울철에만 관세를 낮춰주는 계절관세를 적용해 국내 피해를 최소화하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칠레측은 이 같은 우리측 양허안에 대해 그 동안 완강한 거부 입장을 밝혀왔다. 자국으로서는 가장 중요한 수출품목인 사과와 배 등을 예외로 하거나 양보할 경우 국내 여론을 설득할 수 없다는 논리였다. 양국의 협상은 비관적이었다.
그러나 8월 5차 공식협상과 몇 차례의 실무협상을 거치면서 양측의 의견이 좁혀지기 시작했다. 우선 칠레측은 사과와 배의 예외를 인정하는 대신 우리나라의 주요 수출품인 냉장고와 세탁기도 예외로 하자는 대안을 제시했다. 한국산 세탁기와 냉장고는 칠레 시장에서 90%와 50%의 점유율을 보이는 대표적인 수출품이나, 칠레는 자국산 냉장고 및 세탁기와의 경쟁을 감안해 이 두 품목의 제외를 요구한 것이다.
임기내 협정 타결을 목표로 하고 있는 현 정부로선 칠레의 이 같은 요구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입장. 정부 관계자는 "협상은 기본적으로 주고 받는 것이다. 챙기기만 하고 주지 않으려 하면 깨질 수 밖에 없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칠레의 최대 수출품목인 전기동(銅)의 관세철폐 시점에 대해서도 이견이 쉽게 좁혀지지 않았으나, 관세철폐 유예기간을 7년으로 하기로 잠정 합의한 것으로 전해졌다. 우리측은 당초 10년간 유예를 주장했고, 칠레는 즉시 관세철폐를 요구했으나 양측이 한발씩 양보한 것. 반면 우리나라의 최대 수출품목인 자동차에 대해서는 우리측 주장이 받아들여져 즉시 관세철폐로 가닥이 잡힌 것으로 전해졌다.
칠레는 현재 쇠고기 등 일부 축산물과 유제품 과일통조림 등 농산물 가공품의 수입물량 확대와 일부 농산물의 관세철폐 유예기간 단축 등을 추가로 요구하고 있다. 이에 대해 우리측은 사과·배 외에 일부 농산물에 대해 추가 예외를 요구하겠다는 입장이어서 18일 열리는 6차 공식협상 결과가 주목된다. 그러나 남은 이견들이 협상에 걸림돌이 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의미와 과제
한·칠레 FTA 타결은 경제적 효과보다 상징성이 더 크다. 우리나라가 대외적으로 한 약속을 끝까지 지킨다는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신뢰도 제고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정부가 연내 협상 타결에 강하게 매달리는 이유도 바로 이 점이다. 또 현재 논의가 진행되고 있는 한·일 FTA, 한·중·일 3국간 FTA 등에도 영향을 주어 FTA 추진이 급물살을 탈 수 있다.
하지만 한·칠레 FTA가 시한에 쫓겨 추진하다 보니 '반쪽 FTA'로 전락했다는 비판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타결에 급급해 상호 관심 품목을 제외함으로써 경제적 효과가 그만큼 반감될 것이기 때문이다.
최낙균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실장은 "대외 신뢰도 제고와 수출시장 확보라는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되지만, 국내 이해관계 조정 및 취약산업의 구조조정 등의 과제를 남겼다"며 "미국처럼 대외 통상협상과 관련해 국내 산업구조 조정을 지원할 수 있는 기본법을 제정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김상철기자 sckim@hk.co.kr
■축산·과수農 큰 타격
한·칠레간 자유무역협정(FTA)이 타결될 경우 국내에서 가장 타격을 받을 분야는 과수와 축산 등 농업 부문이다. 한·칠레간의 FTA 협상이 3년 가까이 답보 상태를 면치 못했던 것도 농산물 수입 문제 때문이었다.
남한의 8배나 되는 광활한 영토를 가진 칠레는 구리 초석 철광석 등 광물자원과 포도 사과 키위 복숭아 체리 등 과수 작물의 세계적인 수출국. 소, 양 등 축산물 분야에서도 미국, 호주 등 경쟁국에 비해 70% 정도 낮은 수출 가격을 유지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한꺼번에 모든 무역 장벽을 걷어내는 FTA가 타결될 경우 영세한 국내 과수·축산 농가는 큰 타격을 입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은 FTA 타결로 칠레산 소고기가 수입될 경우 수년 내 국내 시장의 32%를 점유, 총 6,276억원의 국내 농가 피해가 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계절 관세'가 부과될 것으로 보이는 포도의 경우 현재 칠레산은 시중에서 ㎏당 3,000원에 거래되고 있는데 반해 국내산 온실포도는 4,200원으로 30%가량 비싸다. 더구나 앞으로 10년간 칠레산에 대해 연간 10%씩 관세를 내리게 돼 가격 차는 더욱 벌어질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과일 수입으로 인한 농가피해액은 총 95억원 정도에 그칠 전망이다.
농림부 관계자는 "이번 협상은 가능한 국내 농가의 피해를 최소화 한다는 대명제 하에 진행되고 있어 큰 염려를 안 해도 될 것"이라며 "협상에서 사과, 배의 수입은 금지하고 포도도 계절 관세를 부과키로 해 과수 농가의 피해는 크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농업인들이 이번 협상에 극히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 이유는 피해 규모보다는 그간 어렵게 지켜온 농산물 수입 장벽이 허물어지는 상징성 때문이다. 칠레 산을 기폭제로 해서 해외 농산물 수입 도미노 현상이 본격화 할 것이라는 우려다. 이에 따라 한국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를 비롯한 농가들은 22일 농정 실패를 규탄하고 수입 개방 철회를 촉구하는 궐기대회를 열 계획이다.
도하개발아젠다(DDA)에 따라 2004년까지 농업·서비스·지적재산권 등 7개 과제에 대한 협상을 벌여야 하는 정부에게 있어 칠레와의 FTA 협상은 개방의 첫 단추를 푸는 시험대가 되고 있다.
/송영웅기자 herosong@hk.co.kr
■ 주요국, FTA추진현황
우리나라는 중국과 함께 세계에서 FTA를 전혀 맺지 않은 예외적인 나라다. 그러나 세계적인 추세는 우리를 언제까지 외톨이로 버틸 수 있게 허락할 것 같지 않다. 최근 들어 미국, 일본, 중국 등 주요 국가들은 어느 때보다 FTA를 적극 추진하고 있다.
일본은 이달말 멕시코에서 열리는 제10차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기간 중 멕시코와 FTA에 공식 서명할 것으로 알려졌다. 이 협정은 2004년 발효될 예정이다. 멕시코는 일본에 이어 싱가포르와도 FTA 협상을 벌이고 있으며, 우리나라에도 비공식적으로 추진 의사를 밝힌 바 있으나, 아직 구체적인 논의는 이뤄지지 않고 있다.
최근 주목되는 것은 중국의 움직임이다. 중국은 다음 달 열리는 동남아국가연합(아세안) 연례 정상회담에서 아세안과 10년내 자유무역지대를 창설한다는 기본 협정을 체결할 예정이다. 양측은 지난 달 브루나이에서 FTA체결을 위한 기본 골격에 합의, 내년부터 농산물을 비롯한 특정 제품의 관세 인하를 단행키로 했다. 우리로선 동남아 시장을 중국에 몽땅 내주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미국도 남미를 통합한 범미주 자유무역협정(FTAA)의 체결을 강력 추진하고 있다. 이처럼 세계화의 한편으로 블록화의 경향이 노골화하고 있으나 우리의 걸음걸이는 여전히 더디기만 하다.
올 들어 한·일 FTA 체결을 위한 산·관·학 공동연구회가 2차례 열려 논의가 다소 활성화하고 있으나, 정부 차원의 협의까지는 아직도 상당한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 한·중·일 3국의 FTA도 '비즈니스 포럼' 등 여러 채널에서 거론은 되고 있으나 아직은 탐색 차원에 머물고 있다.
/김상철기자 sckim@hk.co.kr
■ FTA란
FTA는 Free Trade Agreement의 약자다. 말 그대로 국가간에 무역을 자유화하자는 협정이다. 세계무역기구(WTO)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다자간 협정과 달리 해당 국가간 양자 협정이라는 점이 다르다. 자유화는 무역에서 관세와 비관세 장벽을 완전히 철폐하는 것이 목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국내 사정에 따라 많은 예외를 두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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