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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622)아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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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622)아롱

입력
2002.10.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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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10월17일 프랑스 사회학자 레몽 아롱이 78세로 작고했다. 프랑스 지성사의 맥락에서 '지식인'을 단순한 '학자'와 구별하는 기준이현실에 대한 참여 또는 구속이라면, 아롱은 지식인의 한 모델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 정치나 사회문제에 대한 아롱의 개입은 '지식인'이라는 말에 고전적 울림을 부여한 동갑내기 사르트르의 현실 개입 못지않았다. 그러나 아롱의 참여는 동시대 프랑스 지식인들의 전형적인 참여와는 거리가 있었다.첫째, 아롱은 대다수 프랑스 지식인들의 자연스러운 이념적·정치적 둥지였던 좌파에 속하지 않았다. 파리 고등사범학교 재학시절 잠깐 '사회주의 학생 동맹'에 들었다가 나온 이래, 아롱은 죽을 때까지 고개를 왼쪽으로 틀지 않았다. 둘째, 우파 지식인으로서 아롱의 참여는 열정보다 이성에 바탕을 두었다. 그는 좌파의 친공산주의든, 중간파의 유럽주의든, 우파의 신식민주의든, 이성보다 열정에 이끌리고 있다고 자신이 판단한 모든 '주의'를단호히 거부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런던의 '자유 프랑스' 시절 이래 긴밀한 정치적 동반자였던 드골이 알제리를 독립시키기로 결정하기 여러 해 전부터, 아롱은 공인된 우파답지 않게 프랑스가 알제리에서 손을 떼야 한다고 주장했다. 셋째, 아롱의 참여는 단속적(斷續的)이었다. 1981년에 나온 그의 대담집 제목대로 아롱은 '참여적 방관자'였다. 그 참여와 방관은 동시적이라기보다 선조적(線條的)이었다. 그는 더러는 참여자였고, 더러는 방관자였다.

종교를 '민중의 아편'이라고 규정한 마르크스의 말을 비틀어 마르크스주의를 '지식인의 아편'이라고 조롱하고 1968년 혁명을 백안시한 이 방관자가 프랑스 지식인 사회에서 많은 벗을 얻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역사는 그의 손을 들어준 것 같다.

고종석/편집위원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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