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워싱턴과 인근 버지니아주 등에서 얼굴 없는 저격수(스나이퍼)에 대한 대대적인 체포 작전이 벌어지고 있는 가운데 14일 12번째 범행이 발생했다. 이날 버지니아주 페어팩스 카운티 폴스 처치의 대형 쇼핑 센터 주차장에서 한 40대 백인 여성이 총에 맞아 숨져 11번째 피해자가 됐다. 이 달 2일부터 시작해 2주째 워싱턴 일대에서 이어지고 있는 저격수의 조준 살인으로 이날까지 9명이 숨지고 2명이 크게 다쳤다. 첫번째 범행에서만 피해자가 나오지 않았다.▶9번째 사망자
이날 밤 9시 15분께 워싱턴 외곽 버지니아주 폴스 처치의 세븐 코너스 쇼핑센터 주택수리용품점 홈 디포 주차장에서 린다 프랭클린(47·여)이 한 발의 총격을 받고 그 자리에서 숨졌다. 이 여성은 남편과 함께 승용차 짐칸에 물건을 싣던 중 머리에 총탄을 맞았다.
톰 메인저 페어팩스 카운티 경찰서장은 "단정하기에는 이르지만 연쇄 저격 사건과 관련됐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말했다. 경찰은 이번 사건을 포함, 최근 범행 현장에서 여러 차례 목격된 크림색 시보레 아스트로 밴을 긴급 수배했다.
이와 별도로 볼티모어주 경찰 당국은 흰색 밴 차량 한 대를 적발해 차 안에서 공격용 소총과 총탄, 저격 안내서 등을 발견하고 이 밴의 소유자를 조사하고 있다고 현지 TV가 보도했다. 그러나 워싱턴 포스트는 경찰이 이 남자를 용의자에서 배제했다고 밝혔다.
▶범인은 주말에는 쉰다
이번 사건은 휴일(콜럼버스 데이)에 발생한 것을 제외하고는 이전 사건의 양태와 비슷하다. 2일 첫 피격 사건 이후 11건의 사건이 모두 주중에 일어났다. 범인은 2일(수요일)부터 4일(금요일)까지 8건의 범행을 저지른 뒤 주말 동안 잠적했다가 7일(월요일)부터 11일(금요일)까지 3건의 저격을 한 뒤 다시 주말인 12, 13일은 움직이지 않았다.
범죄심리 전문가들은 "범인은 토, 일요일에는 범행하지 않아 마치 주중 근무시간을 지키는 듯한 느낌을 준다"고 말했다. 이들은 범인이 워싱턴 인근에 거주하고 직업을 가졌을 것이라며 범행을 저지른 장소 및 시간이 범인의 근무 장소, 시간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도주로 확보 후 범행
범인은 최근 4차례의 범행에서 주요 고속도로 인근의 주유소나 쇼핑센터와 불과 몇 백 m 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을 선택했다. 범행 후 바로 도주하기 위한 것이다.
경찰은 초기 7건의 사건이 짧은 시간 간격을 두고 비교적 혼잡한 장소에서 벌어졌던 점과 비교해 범인이 범행 준비시간을 확보하면서 도주가 용이한 지점을 선택하는 쪽으로 작전을 바꾼 것으로 보고 있다. 경찰은 11일 사건 당시 현장 부근 95번 고속도로를 3시간 동안 차단하고 시보레 아스트로 밴을 수색했으나 검거에 실패, 범인이 예상보다 빠르게 도주로를 확보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일발필살(一發必殺) 범행
범인은 단 한 발의 총알로 피해자 1명에게 치명타를 입히는 일발 필살(One shot, one kill)의 솜씨로 범행을 한다. 지금까지 중학생 피격 사건의 현장 부근에 죽음을 의미하는 타로 카드와 그 위에 쓴 '나는 신이다'라는 경찰을 조롱하는 메모, 탄피 1개를 남긴 것 외에는 추적에 단서가 될 만한 증거를 남기지 않았다.
또 범행 대상도 인종, 나이, 성별을 가리지 않아 공원이나 술집에서 여성, 매춘부 등 특정한 피해자를 고르는 이전의 연쇄살인 사건과도 다르다. 전문가들은 범인이 범행 후 자기의 주장을 알리는 것도 아니어서 테러리스트의 소행으로 보기도 어렵다고 분석했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이날 "테러의 형태로 보이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테러 측면에서의 증거는 없다"고 말했다.
▶범인은 누구일까
범죄 전문가들은 범인의 신분이나 배경에 대해 엇갈린 진단을 내놓고 있다. 총기 전문가들은 범인이 사용하는 총이 사냥꾼이 주로 쓰는 0.30 구경이 아니라 500m 거리에서도 목표물에 명중할 수 있는 0.223 구경 소총인 점으로 봐 총기 수집에 관심있는 군사전문가일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이와 관련, 미 연방수사국(FBI)은 최근 전역한 스나이퍼의 명단 제출을 국방부에 요청했다. 그러나 문제의 소총은 기본 훈련만 받은 사람도 높은 명중률을 보일 수 있어 반드시 군대나 경찰 출신으로 범인을 한정하기는 어렵다는 견해도 있다. 일부 범죄 심리학자들은 범인이 사회적으로 소외돼 총기로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으려는 과대망상증 환자이거나 지능이 비교적 높은 정신병자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워싱턴=김승일특파원 ksi8101@hk.co.kr
■美 저격살인 공포 확산/타지역 원정 주유… 할인 쇼핑센터도 "썰렁"
희생자가 늘면서 워싱턴 일대 주민들은 누구도 저격범의 표적이 될 수 있다는 공포감으로 극도의 불안에 떨고 있다. 14일은 콜럼버스 데이 대폭 할인이 실시되는데도 주민들이 외출을 삼가 쇼핑센터는 평소보다 한가했다.
공원이나 집 밖에서 운동을 즐기는 어른이나 아이들도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유리창으로 보이는 헬스클럽 등도 기피하고 있다. 메릴랜드와 버지니아주 각급 학교는 이미 학생들의 옥외 활동을 전면 금지했다.
고속도로나 간선도로 부근의 주유소를 피해 일부러 먼 곳까지 가서 주유를 하거나 아예 추가 비용을 지불하고 점원에게 주유를 맡기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 각 업소들은 옥외 좌석을 거둬들였다.
14일의 범행이 교포들의 업소나 사무실 등이 밀집한 애난데일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는 곳에서 발생하자 교포 사회에도 공포감이 엄습하고 있다.
교포 마이클 유씨는 "내일 정상영업을 해야 할지를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다"며 "언제 어디서 총알이 날아올지 몰라 바깥 출입 때 주위를 두리번거리곤 한다"고 말했다.
/워싱턴=김승일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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