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12월18일의 14대 대통령 선거는 초반 민자당 김영삼(金泳三) 후보, 민주당 김대중(金大中) 후보, 통일국민당 정주영(鄭周永) 후보의 3파전 양상을 보였다. 정 후보는 그러나 선거 종반 현대그룹 자금 국민당 유입 사건이 터지면서 기세가 크게 꺾였고, 결국 선거는 두 김씨의 대결로 굳어졌다.14대 대선 역시 지역 분할 선거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다. 선거 결과 영남권에서 80%에 이르는 지지를 받은 김영삼 후보가 997만여표를 얻어 당선됐다. 김대중 후보는 호남에서 몰표를 받았지만 804만여표를 얻는 데 그쳤다.
대선 과정에서 나는 당인(黨人)으로서의 역할을 다했다. 당시 나는 고문이었지만 선거 초반에는 지원 유세팀에는 들어 있지 않았다. 그러다가 정주영 바람이 전국을 강타할 즈음 당 선대위에서 합류 요청이 들어왔다. 김영구(金榮龜) 선대본부장 등은 내게 "국민당 기세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이 고문께서 김영삼 후보와 함께 대도시 유세에 나서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고 지원 유세를 부탁했다.
그러나 나는 김 후보의 진심을 알 수 없어 선뜻 유세 참여를 결정하지 못했다. 그 다음날 김 후보측에서 "도와 달라"는 연락이 들어 왔고, 나는 그때부터 대통령후보 유세반에 합류했다. 원주를 시작으로 춘천 인천 대전 울산 부산 대구까지 대도시를 중심으로 지원 유세에 나섰다.
현장에서 본 정주영 바람은 대단했다. 특히 아파트를 반값에 공급하겠다는 공약이 서민층의 표심을 뒤흔들고 있었다. 나는 유세가 없을 때면 틈틈이 고향인 대구로 내려 가 분위기를 살폈는데 민자당이 절대 우세를 장담했던 대구에서도 정주영 후보의 인기가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우리가 인천 유세에 나설 때쯤 정주영 바람이 수그러들기 시작했다. 현대 계열사의 경리 담당 여직원이 현대그룹 돈이 선거자금으로 흘러 들어간 사실을 교회 목사에게 양심선언을 한 것이 결정타였다.
인천 다음은 대전이었는데 비가 오는 쌀쌀한 초겨울 날씨였는데도 수많은 청중이 김 후보의 유세를 지켜 보았다. 민자당은 상승 곡선을, 국민당은 하강 곡선을 그리고 있음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문제는 대구 경북 지역이었다. 박정희(朴正熙) 전두환(全斗煥) 노태우(盧泰愚) 등 3명의 대통령을 배출했던 이 지역은 처음으로 대통령후보를 내지 못했다. 그 때문인지 정주영 후보에게 유달리 많은 관심을 보이는 듯했다.
12월12일 대구 유세는 민자당으로서는 마지막 총력을 쏟아 부은 행사였다. 유세장인 대구 수성천변에는 무려 100만여명의 군중이 모여 있었다. 그 자리에 온 청중들 가운데 상당수는 아직도 지지 후보를 정하지 못한 상태였다고 할 수 있었다. 나는 유세장을 가득 메운 청중을 보니 힘이 절로 솟았다.
"어차피 여러분이 정주영씨를 찍는다면 그 표는 사표(死票)가 되고 맙니다. 그러니 귀중한 표를 버리지 말고 김 후보를 밀어 주십시오." 연설이 끝나자 박수와 함께 '김영삼! 김영삼!' 연호가 길게 이어졌다. 나는 우왕좌왕하던 부동층이 김영삼 후보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음을 확신했다.
선거전 막판에 터진 '부산기관장 대책회의 사건'으로 김영삼 후보는 한껏 긴장했다. 흔히 '초원복집 사건'으로 불린 이 사건은 결과적으로 오히려 영남표를 더욱 단단하게 결집시켰다. 나는 김 후보의 승리가 이미 굳어졌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18일 밤 나는 당사에서 김종필(金鍾泌) 대표 등과 함께 초반 개표 진행 상황을 지켜 봤다. 당 관계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승리의 기쁨을 나누느라 정신이 없었다. 나는 잠시 이 모습을 지켜 보다가 자리를 뜨려고 했다. 그러자 선대위 관계자들이 말렸다. "당선이 확정되면 김영삼 당선자가 오실 테니 좀 기다리셨다가 만나 보고 가시지요." 나는 "선거에서 이겼으면 됐지 일부러 기다려서 얼굴을 보고 갈 것까지는 없다"며 집으로 향했다. 내가 맡은 역할을 다했으면 그 뿐이지 논공행상을 의식해 눈 도장을 찍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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