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세계대전 중인 1917년 10월15일 파리 동쪽 교외 뱅센성(城)의 해자(垓字)에서 마타하리라는 예명(藝名)의 전직 무용수가 총살당했다. 41세였다. 프랑스 군사법원은 그 해 7월 그녀에게 간첩죄를 물어 사형을 선고했다. 마타하리라는 이름에 여성 스파이 신화가 입혀지는 순간이었다.네덜란드의 레바르덴에서 마르가레타 게르트뤼다 젤레라는 이름으로 태어난 마타하리는 레이덴 교육대학을 다니다 19세에 스코틀랜드 출신의 네덜란드군 장교 캠벨 매클라우드와 결혼해 매클라우드 부인이 되었다. 남편의 근무지인 식민지 인도네시아에서 살며 발리 춤을 배운 그녀는 25세때인 1901년 이혼하고 유럽으로 돌아와 파리 몽마르트르의 댄스홀 물랭루주를 중심으로 무희로 활동했다. 첫 예명은 '레이디 매클라우드'였으나 그녀는 곧 이를 '마타하리'로 바꿨다. 마타하리는 말레이-인도네시아어로 '낮의 눈동자' 곧 '태양'을 뜻한다고 한다. 마타하리의 요염한 나체춤은 타고난 미모와 어우러져 그녀를 파리만이 아니라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댄서로 만들었고, 그녀는 이내 파리 상류 사회에도 드나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불세출의 무희도 나이를 당해낼 수는 없었다. 서른 중반을 넘기면서 그녀의 인기는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터졌다. 독일군 참호에도 프랑스군 참호에도 마타하리의 핀업 사진이 걸려있었지만, 그녀의 벌이는 예전 같지 않았다. 마타하리는 독일측과 프랑스측으로부터 거의 동시에 스파이 활동을 제안받았고, 이를 둘 다 수락했다. 그러나 그녀의 서툰 이중 간첩 활동은 곧 프랑스 정보부에 들통났다. 마타하리는 법정에서 자신이 독일측으로부터 돈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간첩 활동을 하지는 않았다고 항변했다. 그 말은 전시(戰時)의 재판관을 설득시키지 못했다.
고종석/편집위원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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