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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정년 이후]예술의전당서 봉사 노인환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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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정년 이후]예술의전당서 봉사 노인환씨

입력
2002.10.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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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은퇴 후 아내마저 저 세상으로 먼저 보내고 좌절에 빠졌던 노인환(魯仁煥·67)씨는 이듬해 예술의전당에서 자원봉사를 시작한 이후 새로운 삶을 즐기고 있다. 그는 함께 자원봉사를 시작했던 40여명의 저명 인사들이 모두 떠난 공백을 혼자 메울 정도로 예술의전당의 '명물'이 됐다. 그는 "손 하나만 있으면 이웃을 도울 수 있으니 인생은 참으로 값지고 즐거운 것"이라고 쾌활하게 말한다.

"안녕하세요! 자원봉사 할아버지." 예술의전당 음악당에서 최근까지 도우미 아르바이트로 일했던 어느 여대생이 나에게 보낸 이메일의 첫 구절이다. 매표소의 어느 젊은 여성도 "저는 할아버지의 팬이에요"라고 반갑게 대했다. 모두 고맙지만 나로선 호칭이 불만이다. '젊은 오빠'는 지나치다고 해도 '아저씨'나 '선생님'정도로 불러주면 좋겠는데….

나는 1958년 대학을 졸업한 뒤 60년 초 대만 무역상사에 입사했다. 62년 귀국해 몇몇 기업을 거쳐 봉제수출업체를 직접 차려 경영하다가 97년 고임금 등에 따른 경영난으로 회사를 정리했다. 37년 동안 줄곧 수출업에 종사했지만 남은 것이라곤 32평 아파트 한 채와 담낭암으로 6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은 환갑 나이의 아내뿐이었다. 하지만 그 해 10월 어느 화창한 오후 아내마저 끝내 내 곁을 떠나 하늘나라로 가버리자 나는 망망대해 한 조각 낙엽 신세가 됐다.

좌절의 그림자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던 나에게 한 가닥 소망의 빛이 날아온 것은 98년 이른 봄. 예술의전당이 창립 10주년을 기념, 사회 저명인사와 부인들을 주축으로 자원봉사 제도를 만들면서 보통사람인 나도 끼어준다는 것이었다. 평소 클래식 애호가로 자처하며 활동한 덕분이었다.

나는 사업차 미국을 자주 방문했는데, 특히 둘째 딸 희재가 12세부터 피아노 공부를 하고있어 필라델피아와 뉴욕에 가면 주머니 사정이 허락하는 대로 콘서트홀이나 박물관에 가곤 했다. 그 곳에는 으레 희끗희끗한 머리의 자원봉사자들이 안내, 질서유지 등을 맡아 언제나 미소를 띠고 정중하고 세련되게 처신하는 것을 자주 목격했다. 미국이 오늘날 세계의 리더로 활약할 수 있는 이유중 하나는 바로 이 청교도 정신의 자원봉사제도가 보편화하고, 상류층의 참여도가 높은 데 있다고 확신한다. 그래서 항상 자원봉사를 동경하던 참에 예술의전당에서 그 기회를 잡게되자 새 애인을 얻은 양 마음이 들떴다.

예술의전당 음악당에서 일주일 평균 나흘, 오후 6시30분부터 9시30분까지 안내 명찰을 가슴에 달고 안내, 질서유지, 통역 등 닥치는 대로 봉사한다. 젖먹이부터 70대에 이르기까지 남녀노소 모두 나의 손님들이다. 3년 전엔 단체관람 온 일본의 초등학생과 가족을 안내하며 택시도 잡아준 일이 있었다. 그 후 그 어머니로부터 감사편지를 수차례 받았다. 나를 본받아 자원봉사를 시작했다는 서신도 받았다. 모 대사관 참사관은 감사장과 그 곳 토종꿀을 보내왔다.

음악당에 나갈 때면 한국 최고의 사교장이므로 항상 몸 단장과 복장에 신경을 쓰고 향수까지 살짝 뿌린다. 엄청난 비용을 들여 치아교정까지 했다. 최근 받은 아르바이트 여대생의 메일에 "할아버지의 살인적인 미소, ??…"라고 적혀 있었는데 아마도 그 덕인 것 같다. 이렇게 하다 보니 몸에 활기가 넘치고 체내에 엔도르핀이 많이 생성돼 병치레도 안한다. 사람들과 어울려 활기차게 몸을 움직이니 신진대사도 잘 되고 잠도 잘 잔다. 외국어 실력도 유지된다. 애인도 생길만한데 아직 아니다. 내가 재주가 없나보다.

예술의전당 말고 성남에 있는 소망재활원과 정성 노인의 집에 음악인들을 모시고 가서 음악 연주로 이들을 위로, 치유하는 봉사도 하고 있다. 상체가 굽은 한 소녀가 음악을 들으며 등을 긁어달라고 몸짓을 하기에 내가 한 손을 옷 속으로 넣어 긁어주니 얼굴 표정이 편안해졌다. 그런 평화스런 표정을 나는 아직 한번도 보지 못했다. 손 하나만 있으면 불우한 이웃을 이렇게 편안하고 만족스럽게 할 수 있는데….

나는 또 '탈북난민보호운동본부'의 국제조직위원장을 맡아 억압과 기아를 모면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북한을 탈출한 비참한 사람들의 권익과 인권을 위해 일한다. 주로 외국 NGO, 미국과 유럽연합의 의회나 정계, 외국 언론 등과 유대를 다지는 일이다. 어떤 사상이나 주의를 위하기 보다 인도주의와 인권을 위한 봉사여서 더욱 보람을 느낀다.

나는 죽는 날까지 봉사를 할 것이고, 시신으로도 봉사를 할 생각이다. 남을 살릴 수 있다면 눈이든 뭐든 아낌없이 제공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죽어서 다시 사는 것이다.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연령이나 계층을 따지지 말고 죽는 날까지 남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이 늘어나는 것이다. 그것만이 오래, 건강하게, 즐겁게 사는 길이다. 이 얼마나 가치있는 일인가. 아, 인생은 이렇게 즐거운 것이다.

노인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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