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봄이었다. 내 은사 외솔 최현배 선생님께서 "내일 아침밥을 자네 집에서 얻어먹었으면 하는데 괜찮겠나?"라고 전화를 하시고는 이튿날 신촌 댁에서 청파동 산꼭대기 나의 집까지 꼭두새벽에 오신 것이다. 나는 송구스러움에 몸둘 바를 몰랐다.8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한글학회 회장이셨던 최현배 선생님을 비례대표로 국회의원에 선임키로 결정하고, 수도권 선거책임을 맡고 있던 나(8대 국회의원)에게 그 동의를 받아오라고 해 선생님께 간곡히 청을 드린 적이 있었다. 그 때 선생님은 생각과 논의를 해보신다고 했고, 나는 선생님의 승낙 전화를 학수고대하고 있는 처지였다. 선생님께서 친히 오신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었다.
선생님께서는 앉으시자 바로 보료 뒤에 둘러쳐 있는 서예 병풍을 한번 죽 훑어보시더니 "글이 좋은데 자네 그 뜻을 알겠는가?" 하고 물으셨다.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1770∼1845)이 마음껏 휘갈긴 초서를 내가 제대로 읽지 못했던 것은 당연했다.
"내가 자네 밥을 거저 얻어먹을 까닭이 없으니 밥값으로 상 차리는 동안 이 병풍의 글을 풀어 주도록 하지." 선생님이 출중한 한학자이시기도 한 것을 아는 이는 별로 많지 않을 것이다. 선생님의 병풍 해독으로 긴장되고 움츠러들었던 나의 마음이 무척이나 편하고 즐거워졌다.
식사 후 차를 드시면서 "박 대통령의 뜻이라는 자네의 제안을 받아드릴 수 없게 돼 미안하네. 학회(한글학회) 임원들과 몇 차례 협의한 결과 내가 국회에 들어가는 것이 한글과 국어의 백년대계를 위해 이롭지 않다는 결론에 이른 것이지. 보릿고개를 없앤 박 대통령을 돕고도 싶지만 유감이네"라고 말하시고 표표히 사라지셨다.
내가 30년 전의 그 일을 엊그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은 선생님의 한글과 국어에 대한 애정, 그리고 애국심 때문이 아니다. 상대방에 대한 깊은 배려가 얼마나 값진 것이었나 느끼게 해 주셨기 때문이다. 선생님이 타계하신 후 그리고 세상이 점점 더 이기적이 되어 가는 것을 보면서 더욱 그러하다.
만일 우리나라 정치인들이 상대와 국민에 대한 배려를 우선한다면, 그리하여 상대의 자존심을 존중하며 자기의 주장을 편다면 정치판이 이렇게까지 망가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30여년 전 선생님의 나들이와 마음이 더욱 그리워진다.
/강 성 원 (주)성원유업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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