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3월24일 14대 총선에서 민자당은 과반수 확보에 실패했다. 총선 패배는 민자당의 극심한 혼돈을 불렀다. 단순히 책임론을 둘러싼 내분이 아니었다. 92년 대선에 나설 당내 후보 결정과 직접적 연관이 있었다. 반(反) 김영삼(金泳三) 대표 세력은 그에게 총선 패배의 책임을 지워 이참에 밀어 내려고 했다.이를 모를 리 없는 김 대표는 총선 며칠 뒤인 28일 대통령 후보 당내 경선 출마를 전격 선언, 국면 전환을 시도했다. 노태우(盧泰愚) 대통령은 격노했다. 바로 그날 김 대표와의 오찬 회동에서 노 대통령은 불쾌한 감정을 직설적으로 쏟아 냈다. "당신 마음대로 출마를 선언했으니 마음대로 해 보시오. 나는 절대 경선에 개입하지 않겠소."
노 대통령이 김 대표에게 노골적인 불만을 드러내는 등 여권 핵심부의 기류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박태준(朴泰俊) 이종찬(李鍾贊)씨는 출마를 적극적으로 고려, 민정계를 중심으로 세 모으기에 들어갔다. 김 대표로서는 후보 선출을 장담하기 어려운 지경이었다.
이런 가운데 4월8일 노 대통령이 나를 청와대로 불렀다. 노 대통령은 다짜고짜 이렇게 말했다. "김 대표로는 김대중(金大中)씨를 이길 수 없습니다. 새로운 사람을 내세워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나는 김대중씨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김 대표 외에는 대안이 없다고 생각했다. "새로운 사람을 내세우면 부산 경남표가 달아납니다. 대구 경북표도 절반은 사라집니다. 그렇게 되면 대선에서 이길 수 없습니다."
그래도 김 대표에 대한 노 대통령의 불만은 여전했다. "그 사람 내게 한 마디 말도 없이 출마 선언을 했습니다." 나는 또 김 대표를 변호했다. "기자들이 '이종찬씨는 출마한다는 데 김 대표는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묻는 데 '잠깐 기다리시오, 대통령에게 전화해 보고….' 이렇게는 할 수 없는 것 아닙니까. 나라도 그런 상황에서는 같은 대답을 했을 겁니다."
나는 2시간 이상 김 대표를 두둔했다. 노 대통령의 마음도 조금씩 바뀌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회담을 끝내고 돌아서면서 나는 다시 한번 쐐기를 박았다. "김 대표로 결정된 것으로 알고 돌아가겠습니다." 노 대통령은 웃으면서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나는 당시 김 대표가 후보가 되는 것이 순리라고 생각했다. 민자당이 내놓을 수 있는 최선의 카드라는 확신이 있었다. 영남표를 한데 묶을 수 있는 데다 비 영남권에서도 김 대표의 인기가 다른 민자당 예비 후보들보다 높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비록 3당 합당으로 선명성이 많이 빛바래긴 했지만 어쨌든 김 대표의 민주화 투쟁 경력을 가볍게 여길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
노 대통령과 만나고 나온 뒤 나는 회담 내용을 김 대표에게 알려 주려고 했다. 그러나 김 대표는 "지금 급한 약속이 있어 오늘은 어려우니 내일 만나는 게 어떻겠느냐"고 양해를 구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김 대표는 바로 그때 김종필(金鍾泌) 최고위원을 만나러 하얏트 호텔로 가는 길이었다. 나는 "정 그렇다면 내일 아침에 만나야 합니다. 오후에 노 대통령을 만나러 가기 전이어야 합니다"고 다짐해 두었다.
이튿날 오전 나는 김 대표와 만나 전날 노 대통령과 나눈 이야기를 전하며 "노 대통령의 마음이 거의 김 대표에게로 기울었습니다"고 말했다. 김 대표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았다. 나는 "청와대에 들어가게 되면 노 대통령이 섭섭해 하고 있는 것을 풀어 주고, 또 퇴임 이후에 대해 안심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게 필요합니다"고 조언했다.
결국 9일 오후 노 대통령과의 만남에서 김 대표는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었다. 당은 이후 빠르게 김영삼 체제로 굳어져 갔다. '김영삼 추대위'가 구성됐고, 이른바 '노심(盧心)'도 김 대표 쪽으로 확연하게 기울었다. 5월19일 박태준씨가 노 대통령의 설득으로 출마를 포기한 가운데 치러진 전당대회에서 김 대표는 66%의 높은 지지를 얻어 대통령후보로 확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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