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얼마 안 남았는데, 덜 끝낸 일이 태산이여." 9일 새벽 강원 양양군 손양면 송현리 양양내수면연구소. 남대천(南大川) 제방 위에 선 엄광선(52) 작업반장은 마음이 조급해진다. 안개가 자욱한 강물을 응시하는 엄 반장의 모습은 군대 간 자식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그것과 닮았다. 그의 말처럼 이제 며칠 뒤면 남대천 150리 물길을 따라 자식 같은 연어들이 수백 수천의 물고랑을 만들며 달려 올 것이다.
▶막바지 연어맞이 채비
내수면연구소 14명의 직원들은 요즘 연어맞이 준비에 여념이 없다. 이 연구소는 연어 무지개송어 등 찬물에서 자라는 어류의 생태와 수질환경을 연구하기 위해 1984년 설립됐다. 연어가 회귀하는 이맘 때면 알을 받아 인공수정 시킨 뒤 치어로 키워 방류해, 돌아오는 연어의 수를 매년 늘리는 일에 전 직원이 매달린다.
이날 작업은 연어를 잡을 그물 설치. 남대천 수심이라야 깊은 곳도 어른 가슴팍에 못 미치지만 물 속에서 파이프를 박아가며 그물을 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물 작업이 끝나면 알을 받아 낼 채란장(採卵場)까지 연어를 옮길 컨베이어를 설치해야 한다. 15년째 이 곳에서 연어와 씨름해 온 엄 반장이 가슴장화를 신고 강 물로 들어서자 직원들도 뒤를 따르고, 3∼4㎏은 족히 될 모래주머니 30여 개를 실은 작업선을 강 한가운데로 밀었다. 이 작업은 그물을 강 바닥에 고정시켜 그물에 걸린 연어들이 빠져나가지 못하게 막기 위한 것. 한 직원은 "모래주머니 2,000개를 닷새동안 만들었더니 감각이 없더라"며 거북 등껍질 같은 손바닥을 펴 보였다.
중요한 작업은 반드시 엄 반장의 손을 거쳐야 한다. 강 바닥 다지기도 그랬다. 하구를 지난 연어들이 장애물 없이 포획장까지 와야 하고, 오는 도중에 배란할 마음을 품지 않도록 일정한 수심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엄 반장은 대나무 한 그루로 수심을 눈대중하면서 포크레인을 인솔해 닷새동안 강 바닥을 누볐다고 한다.
올해 작업은 예년보다 서너 배 더 힘들었다. 9월 초 태풍 '루사'로 남대천 제방이 붕괴되면서 연구소 1층이 물에 잠겼고, 남대천 하구 1㎞에 설치돼 있던 포획장과 장비들도 대부분 유실됐다. 600평 남짓 부화동(孵化棟)은 아예 뻘밭이었고, 전기 시스템과 급수·정화시설도 대부분 고철덩어리로 변했다. 수산연구사 이철호(李哲鎬·45)씨는 "직원들과 군인 등 자원 봉사자들이 지난 달포 동안 처음부터 새로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일했다"고 말했다.
▶"웬수같고, 자식같은 놈들이죠"
11일부터 내달 말까지는 바다 정치망어업 허가를 받은 경우를 제외하면 연어 포획이 전면 금지된다. 이 기간이 내수면 연구소가 일 년 중 가장 바쁜 시기이기도 하다. "출·퇴근이 없는 시기이죠. 하루 24시간 근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연구·행정 실무책임자인 홍관의(洪寬義·45) 연구관의 말이다. 새벽부터 시작한 채란-수정-부화장 이동 작업은 해질녘에야 끝나기 일쑤고, 연어가 몰릴 땐 심야 작업도 벌여야 한다. 그는 "어른 허벅지만한 놈들이 퍼덕이면 허리가 휘청거릴 정도이고, 바쁠 땐(10월 중순∼11월 초) 하루 1,000마리 이상과 씨름을 해야 한다"며 "하지만 그래도 이 때가 가장 행복한 시기"라고 말했다.
날이 저물고 하루 일이 끝나면 한 켠에서는 실한 연어 한 마리가 모닥불 위에 얹힌다. 뒤풀이 소주잔이 오가면 직원들도 모처럼 감상에 젖는다고 했다. 불 위에 얹힌 연어도 여기서 태어나 멀리 북양(北洋)의 거친 파도와 함께 자랐을 터. 알래스카 만을 떠나 베링해와 캄차카반도를 지나는 수 십만 리의 여정 끝에 태평양의 한 실낱 같은 물길을 찾아 든 녀석이다. "힘들 땐 지긋지긋한 '웬수'같지만 돌아 앉으면 보고 싶은, 마누라 같고 자식 같은 놈들이죠."
▶"그래도 연어는 효자야"
들떠 있는 연구소 사람들과 달리 최근 지역 주민들은 우울하기만 하다. 수해로 올해 연어축제가 취소됐기 때문이다. 지역 주민들에게 연어는 '꿈'이기 이전에 생계 수단이자 지역경제 활성화의 기대주다. 지난 해 연어 축제를 전후해 남대천을 찾은 관광객은 1만5,000여명. 강 어귀 마을인 조산리 이장 이호일(44)씨는 "몇몇 가구는 민박을 받으려고 보일러도 새로 놓았는데 올해 축제가 무산돼 큰 일"이라고 말했다.
채란이 끝난 연어를 구이나 포로 조리해 관광객들에게 판매해 온 가평리 부녀회도 고민이 이만 저만이 아니다. 마을 부녀회장 최금숙(47)씨는 "큰 돈은 안됐지만 마을의 쏠쏠한 수입원이었는데 올해는 작년만 못할 것"이라며 "물난리 때문에 이중으로 피해를 보게 됐다"고 푸념했다.
연어로 재미를 보는 사람들은 뜻밖에 '도둑 낚시꾼'들이다. 이들이 노리는 것은 고기가 아니라 알. 한 주민은 "낚시 미끼용으로 도회지로 보내려는 사람들에게 한 밤중에 알을 털리는 연어가 적어도 1,000마리는 될 것"이라고 말했다. 주민들은 회귀하는 연어가 늘어나 이 지역에 전용 냉동 저장시설도 들어서고, 가공·유통산업도 활성화할 날을 기다리고 있다. "눈만 달고 나갔다가 다 자라 돌아왔듯이 언젠가는 믿음직한 지역 경제의 효자가 되겠지요."
/양양=최윤필기자 walden@hk.co.kr
사진=고영권기자
● 연어의 일생
강원 양양 앞바다에 은백색의 연어가 모습을 나타내는 것은 매년 9월 중·하순 무렵. 그러나 남대천을 거슬러 오르려면 보름 정도 더 지나야 한다.
북태평양의 거친 물살을 헤쳐 온 피로를 풀고, 마지막 생명여행을 위한 체력을 보충하기 위해서다. 강을 오르는 동안 연어는 장엄한 출산의식을 준비하듯 일체의 먹이를 먹지 않는다.
몸은 울긋불긋한 혼인색을 띠고, 붉은 살빛도 하얗게 변한다. 주민들은 이를 두고 '진이 빠진다'고 표현했다. 수심 40∼80㎝ 상류까지 거슬러 오른 한 쌍의 연어는 지느러미와 턱으로 지름 1m, 깊이 50㎝ 정도의 웅덩이를 판다.
먼저 암컷이 지름 0.6∼0.7㎝크기의 오미자 열매 같은 붉은 알(2,000∼4,000개)을 낳으면, 주변을 돌며 다른 수컷과 천적을 경계하던 수컷이 하얀 정액을 쏟아낸 뒤 자갈로 웅덩이를 덮는다. 배란·수정을 끝낸 연어는 살점과 지느러미가 찢기고 만신창이가 된 채 숨을 헐떡이다 죽는다.
양양내수면연구소는 연어의 생명활동 일부를 대신해 주고 있다. 자연 산란은 수정률이 낮고 산천어나 은어 황어 등 천적들의 알 도둑질이 심해 회귀율이 낮기 때문이다.
직원들은 포획그물에 걸린 암컷 연어의 배를 갈라 알을 빼낸(채란) 뒤 수컷의 정자를 뿌려 수정시킨다. 수정된 알은 세란작업을 거친다. 수정란에 묻은 불필요한 정충을 씻어내야 부화율이 높기 때문이다.
수정란은 부화조로 옮겨져 약 30일이 지나면 눈이 나온다. 부화조 물은 2차례 여과와 자외선 살균을 거친 청수(淸水)로 섭씨 8도의 흐르는 물이어야 한다. 20일이 지나면(수정후 50일) 부화하고, 배냇먹이인 난황을 다 소화하기까지는 30일을 더 기다려야 한다.
난황을 뗀 연어는 야외 사육지에서 2∼3월까지 자라 몸 길이가 6∼7㎝에 이르면 방류된다. 연어 치어는 5월 하순까지 두어 달을 남대천에 머문 뒤 바다로의 험난한 유영을 시작한다.
알래스카와 베링해의 거친 파도와 함께 2∼4년을 보낸 연어는 2∼7㎏ 무게의 성어로 성장하고, 어미가 그랬고 어미의 어미가 그랬듯이 이맘때 모천(母川)으로 회귀한다.
/최윤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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