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산(馬山) 어시장을 찾는다. 아직 그래도 사람 땀내음 물씬할 곳이 장바닥만한 데 있으랴 하는 생각에서다. 한때 미더덕과 꼬시락이 동이로 그냥 퍼 담아낼만큼 넘쳐났다던 마산 앞바다, 올해로 개항 103년이 된 마산항이 생기기 훨씬 전부터 중부 경남의 수산물이 집산되던 장터다. 어패류가 자글자글하던 앞바다는 그러나 십수년 전부터 매립지로 바뀌었다. 그 유명했던 마산의 술집들 '홍콩빠'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백화점과 할인매장과 대형 외식집들이 그 자리에 들어섰다.
바닷바람보다 삶의 무게에 쩔어 주름졌을 노친네들이 해안도로가에서 길게 줄지어 소줏병을 권커니자커니 뭔가를 드시고들 있는 것이 보였다. 그래 역시 어시장이지, 내심 쾌재를 부르며 달려가본다. 전어(錢魚)였다. 올해로 3회가 된다는 마산 전어축제, 무료 시식회에 노인들은 가을볕 쐴 겸 일터에서 집에서 노인정에서 죄다 몰려나온 듯했다.
"봄 도다리, 가을 전어"는 마산 사람들에겐 하나의 '구호'다. 억센 그들은 횟감도 육질 좋은 고급 어종보다는 뼈째 씹어먹는 잡어 '세꼬시'를 좋아한다. "가을 전어 대가리에는 참깨가 서말"이라는 말도 있지만 전어는 가을 한철 온통 마산을 일렁거리게 만든다. 한국에서 나는 전어의 80%가 마산 어시장을 통해 전국에 공급된다. 이맘때면 매일 새벽녘 이곳 어시장에는 전국에서 몰려온 400∼500대의 물차들이 전어를 실어가려 늘어서있는 진풍경이 빚어진다.
전어는 성질머리 급한 고기다. 뭍으로 나와서는 하루를 넘기지 못하고, 스트레스를 받으면 스스로 숨을 끊는다. 어찌 보면 마산 사람들이 그토록 좋아하는 전어는 마산이라는 지역과 마산 사람들의 기질을 그대로 알게 하는 어종이다. 이 지역 출신 시인 노산 이은상의 '가고파'와 아동문학가 이원수의 '나의 살던 고향은'의 고장이자 작곡가 조두남, 조각가 문신 등의 고향이기도 하지만, 한국현대사에서 마산은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린 3·15의거의 도화선이다. 유신을 종식시킨 부·마사태의 진원지이기도 하다.
"전어야 마산 '떡전어'지요. 포 뜨지 않고 내장째 떡처럼 뚝 뚝 썰어먹는 이곳 전어회의 맛을 어디다 비교합니까." 타지에서 마산 온지 15년째, 어시장에서 횟집을 하고 있다는 제1대 '전어 엿사리 아지매' 황정숙(45·사진)씨는 "거칠고 투박하지만 인정스럽고, 어디 하나 버릴 것 없는 전어를 닮은 이곳 사람들을 어시장에서 대하다 보면 살고 싶은 의욕이 절로 생깁니다"라고 말했다. 전어 아지매(아주머니의 사투리)는 전어 축제에서 선발된다. 엿사리는 중치의 전어를 가리키는 말이다. 큰놈을 떡전어, 작은놈은 새살치라고 부른다. 이 아지매는 취재 왔다고 하자 가게 바로 옆 자신의 아파트 옥상으로 끌고 가서 마산의 전경을 보여준다.
멀리 무학산 자락 아래, 합포만을 앞에 두고 구시가지와 매립지가 뒤엉켜 있는 마산은 달라지고 있었다. 도심의 창동, 오동동이 초저녁의 네온불빛으로 은성해지면 거리거리에 흘러넘치던 그 꽃답던 젊은 여인들, 패기 넘치던 청년들은 전어 축제에 안 오고 어디로 갔을까. 축제에는 노인들 뿐이다. 한 시절의 유행가가 절로 떠오른다. '누가 그녀를 보았는가, 아무도 모른다네 나도 모른다네…'.
1970년 마산 땅 26만여 평에 대한민국 최초의 경제특구인 '수출자유지역'이 건설돼 2년후 준공된다. 지금 북한 신의주가 경제특구의 꿈을 꾸기 꼭 30년 전이다. 69년 19만이던 마산 인구는 5년만인 75년 37만 명으로 늘어 무려 95%의 인구성장을 보였다. 80년대 중반에는 50만명을 넘어 전국 7대 도시로까지 성장한다. 각지의 10대, 20대 선남선녀들이 몰려들었다. 마산은 한국의 산업화, 도시화의 한 전시장이 됐다. 하지만 지금 마산 인구는 오히려 줄어 43만이다. 87년 3만 6,000명을 넘었던 수출자유지역의 고용자 수는 2001년 1만2,000여 명에 불과하다.
도시 공동화(空洞化)였다. 시계를 맞대고 있는 창원에 기계공단이 들어서고, 그곳으로 도청 등 공공기관과 기업체들이 옮아가고, 엄청난 규모의 아파트 단지가 쑥쑥 생겨나자 더 땅을 넓힐 곳도 없는 마산 땅의 활력은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70∼80년대 꿈을 쫓아 마산으로 몰려들었던 젊은이들이 젓가락 장단으로 주전자를 찌그러뜨리며 청춘의 열기를 발산하던 오동동의 동동주집들은 흔적이 없다. 요즘 마산 사람들은 술 마시기 위해 오히려 창원으로 넘어간다. 30년간 마산만으로 무차별하게 쏟아진 공업폐수는 '내 고향 남쪽바다 그 푸른 물 눈에 보이네'라던 가고파의 바다를 최악의 해양오염지역으로 만들었다. 시민들의 휴식처이던 가포해수욕장은 폐쇄됐고, 그곳 12만평의 해저오염원 제거 계획은 IMF 이후 중단됐다. 도다리, 꼬시락이 자취를 감춘 것은 물론, 사실 마산을 경유하는 전어는 인근 진동 앞바다에서 잡히는 것들이다. 기자는 꼭 10년 전 '마산만 살리기 운동'을 취재한 적이 있다. 그나마 지금은 해안도로변에서 숭어가 낚인다며 낚싯대를 휘두르고 있는 시민들을 만날 수도 있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한번 죽어버린 바다는 좀처럼 회생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최초의 경제특구 마산은 한국 산업화 30여년의 명암과 영욕을 한눈에 보여주는 도시가 됐다. 마산을 보면서 우리 땅의 삶이나 생활공간의 어떤 안정감, 혹은 지속성 내지 전통이라는 막연한 단어들이 자꾸 떠오른 것은 그 때문이었을까. 전어축제로 흥이 난 어시장 사람들은 "오이소, 보이소, 드이소"라 말한다. "오십시오, 보십시오, 드십시오." 마산이 새로운 활력을 되찾을 때, 기약은 없어도 '신 국토기행'의 발길이 다시 이어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떡전어회를 된장에 듬뿍 찍어 씹으며 걸음을 돌려야 했다.
/하종오기자 joha@hk.co.kr
■마산수출자유지역 산역사 하영주씨
"밤새 잔업할 때였지요. 컨베이어 벨트에 드러누워 새우잠을 청하다가, 식당도 없어 여사원이 몇 ㎞나 떨어진 집으로 가서 한꺼번에 동료들의 밥을 지어 함지박에 담아 머리에 이고 오곤 했는데, 하루는 야간 통행금지에 걸린 거예요…. 억척스럽던 시절이었습니다."
마산수출자유지역에서 30년째 일하고 있는 최장수 직원인 하영주(48) 한국소니전자 경영기획부 무역과 담당부장. 그가 들려주는 30년의 일화들은 70∼80년대 '수출 전선'에 나섰던 젊음들의 역사다. 하씨는 마산공고 전기과를 졸업하고 1973년 8월 20일 당시 한국동양통신공업주식회사에 라디오 수리 기사로 입사했다. 라인장, 주임, 과장을 거쳐 2000년 부장으로 승진했다. 3∼4년 전까지만 해도 마산수출자유지역이 생기던 해부터 근무하던 이들이 몇 남아있었지만 그나마 모두 퇴직했다.
"초임이 2만 원이었습니다. 국밥이 97원, 막걸리 한 되가 40원 할 때였으니 적은 돈 아니었지요. 일반 여사원들의 월급은 1만 원 정도였습니다." '수출'이라 불리던 경제특구가 마산에 생기면서 경남 지역 시골 아가씨들은 물론, 80년대 들어서는 경북 전라 충청 지역에 인사부 사람들이 파견돼 여상 졸업예정자 등을 몇백 명씩 모집해 조기취업시켰다.
"주경야독하던 동료들과 퇴근 후 짬을 내 튀김집이나 포장마차에서 '먹어 조지던' 때가 그립네요." 그는 힘들었지만 즐거웠던 직장의 분위기, 흥성했던 마산의 분위기가 참 많이 변했다고 말한다. "요즘은 찾아볼래야 볼 수 없는 인간미 넘치는 시대였습니다." 열심히 일해온 그는 무역협회장상, 산자부장관상도 받았다. 77년에 그도 공주 출신 인근 업체 여사원과 결혼, 2남 1녀를 두고 최근 집을 장만했다고 했다.
/하종오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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