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존폐의 기로에 선 신의주 특별행정구의 불씨를 살리기 위해 남한 출신 행정장관의 임명을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북측이 포스코 명예회장인 박태준(朴泰俊) 전 총리에게 특구 장관직을 제의한 것은 그 만큼 양빈(楊斌) 초대 장관 구금의 파문이 컸다는 점을 시사한다. 북한은 이와 함께 중국과의 갈등에도 특구개발 계획을 포기할 수 없다는 강한 의지를 보인 것으로 분석된다.박 전 총리가 북측의 요청을 수용해 특구 장관에 취임하면 처음으로 남한 국적의 인사가 북한의 관직에 오르게 된다. 그러나 이런 고육책을 내놓았음에도 북한의 'TJ카드'가 성사될지는 불투명하다.
▶남한에 눈을 돌린 의도
북한이 楊 장관의 후임으로 남한 인사를 모색하리라고는 우리 정보 당국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국정원의 대북 관계자는 11일 "북한이 楊 장관의 후임을 찾고 있다는 정보는 있었으나 남쪽 인사가 대상이라고는 상상치 못했다"면서 "이는 사실상 신의주를 남한에 떼어주는 셈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북한은 그러나 楊 장관 파문으로 신의주 특구 구상 자체가 무산 위기에 몰리자 마지막 대안으로 여겼던 남측에 눈을 돌린 것으로 보인다. 북한에 정통한 한 소식통은 "북한은 楊 장관의 후임으로 연형묵(延亨默) 국방위원 등 자체 인사들의 기용도 검토했으나, 신의주 특구를 성공적으로 이끌려면 평양식 사고방식에서 완전히 벗어난 외부의 인물을 택해야 한다는 점에서 백지화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북한은 결국 고심 끝에 남한뿐 아니라 일본, 중국 등에서 '포철 신화'로 인정을 받고 있는 박 전 총리를 물망에 올린 것으로 보인다.
▶북한의 뜨거운 눈길
북한이 박 전 총리를 주목하고 있다는 점은 여러 경로를 통해 우리측에 전해졌다. 이 달 들어 방북한 한 중소기업 관계자는 "북측 무역성 산하 민족경제협력연합회(회장 정운업) 인사들이 갑자기 박 전 총리를 언급하며 '허허벌판에 세계 최대 규모의 철강회사를 세운 것은 대단한 업적'이라고 추켜세웠다"고 전했다. 이 관계자는 "북한 '무역일꾼'들이 잇따라 '박 회장 잘 계시냐'고 안부를 물어와 의아하게 생각했다"고 말했다. 더욱이 북한은 박 전 총리가 중국에서도 경영 능력을 인정 받고 있어 楊 장관 임명이 초래한 양국간 불협화음도 없을 것으로 기대한 것으로 분석된다.
북한이 박 전 총리의 장관 임명을 추진함으로써 신의주 특구의 성격도 바뀔 것으로 보인다. 전문가들은 화훼업자이면서 부동산업자인 楊 장관은 신의주에 가장 먼저 카지노 등 현금 유동성이 많은 사업체를 세울 것이라고 예상해왔다.
▶박태준 특구 장관 실현 전망
박 전 총리는 이미 楊 장관이 구금된 직후 장관직 제의를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박 전 총리가 북한의 제의를 수용하더라도 취임이 실현되기까지는 여러 걸림돌이 있다. 박 전 총리의 장관 취임은 무엇보다도 국가보안법 등 국내법과 충돌할 수 있다. 북한의 신의주 특구 기본법 78조는 '장관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신의주 특별행정구에 충실할 것을 선서한다'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부 당국자는 "법적 잣대도 중요하지만 국민여론이 난제"라고 말했다. 그러나 북측이 박 전 총리에게 특구 장관직을 제의한 과정에서 정부와의 물밑협의가 있었을 개연성이 높아 'TJ 특구장관'의 실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동준기자 djlee@hk.co.kr
■ 왜 박태준인가
박태준(朴泰俊) 전 국무총리가 신의주 특구 장관 후임에 거론되는 것에 대해 그를 잘 아는 경제계 인사들은 충분한 이유들이 있다고 설명한다. 박 전 총리는 1968년 포철을 창업한 이후 사장과 회장으로서 93년까지 포철을 세계 1위의 철강업체로 키워 놓은 인물로서, 철강산업에 관심이 많은 북한은 오래 전부터 박 전 총리를 주목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남북교류가 현재와 같이 활발하지 못했던 80년대 후반에 그는 제철설비의 최고 전문가인 유상부(劉常夫) 현 포스코 회장을 북한에 보내 현지 제철소의 설비를 점검하고 자문토록 한 바 있다. 지난해 8월에는 김영남(金永南)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일행이 포스코를 직접 방문, 제철시설을 둘러보면서 감탄을 자아내기도 했다. 북한은 '허허벌판에 세계 최고의 철강업체를 일궈낸' 박 전 총리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박 전 총리에 대한 북한의 관심은 무엇보다 그의 넓고 깊은 인맥인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박 전 총리의 일본 정·관계 인맥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일본에서 나온 그는 나카소네 야스히로, 다케시다 노보루, 오부치 게이조 등 일본의 역대 총리와 두터운 교분을 가졌을 뿐 아니라 재계 인맥 또한 막강하다.
포철 회장 시절인 92년 하반기부터 중국과의 대형 프로젝트를 추진하면서 중국 정·재계 인사들과도 깊은 교분을 나눠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의 덩샤오핑(鄧小平) 전 주석이 일본 방문 때 이나야마 신일본제철 회장에게 "포철과 똑같은 기간에 똑같은 능력을 가진 제철소를 지어달라"고 요청하자, 이나야마 회장이 "박태준회장 같은 이를 구해주면 하겠다"고 대답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중국과 일본, 또는 한국의 자본을 끌어들여야 할 북한으로서는 이 같은 박 전 총리의 인맥에 특히 관심이 클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 박 전 총리의 사위인 김병주씨가 대표이사로 있는 칼라일아시아 또한 주목을 받고 있다. 미국계 투자펀드인 칼라일아시아의 자문위원에는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 제임스 베이커 전 미국 국무장관, 피델 라모스 전 필리핀 대통령 등 세계적으로 영향력이 큰 인물들이 포진하고 있다. 박 전 총리도 한 때 자문위원이었다. 박 전 총리가 신의주 특구 장관에 임명될 경우 북한으로선 여러가지 활용 가능성을 함께 얻게 되는 셈이다.
/김상철기자 sc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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