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기업경영의 화두 중 하나는 '고객감동'이다. 대기업에서 골목길 작은 가게에 이르기까지 많은 기업들이 고객감동을 내세운다. 관련 마케팅도 봇물을 이루고 있다.나 자신도 '고객감동'을 경영철학의 금과옥조로 삼고 있는데, 이는 20여년 전 우연히 얻은 교훈 때문이다. 1980년대 초 농협에 근무하던 시절, 시내버스를 타고 가다 좌석 위에 붙어있던 문구가 눈에 띄었다. "잔잔한 미소는 상대방의 눈을 즐겁게 하고, 진실한 행동은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글이었다. 인쇄된 것도 아니고 그냥 굵은 펜으로 써서 붙여놓은 모양이 아무래도 버스안내양의 작품인 듯 했다.
가만히 살펴보니 그 안내양의 태도는 다른 안내양과는 조금 달랐다. 만원버스의 혼잡함 속에서도 짜증난 기색은 찾아볼 수가 없었고, 잔돈을 주고받을 때도 씩씩한 인사를 잊지 않았다. 지금 나이가 30대 이후인 사람들은 다들 기억하고 있겠지만 당시 버스안내양에 대한 대우는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었다. 고된 업무에 비해 보수는 박봉이었을 텐데도 밝은 웃음으로 손님 하나 하나를 대하는 그 안내양의 태도는 매우 인상적이었다.
버스에서 내린 뒤에도 그 문구는 한참동안 머리 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한번 만난 손님을 다시는 만나지 않을 수도 있는 버스안내양의 마음가짐이 이러한데, 10년 넘게 금융기관에 종사하면서 늘 고객과 만나고 있는 나는 과연 저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 되돌아보니 부끄럽기만 했다.
그때부터 고객감동을 위한 여러 가지 캠페인을 기획하기 시작했다. "친절에는 돈이 들지 않는다. 진실된 마음만 있으면 된다"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고객 서비스를 제고하기 위한 프로그램들을 마련했다. 이러한 노력은 전국 지점으로 퍼져나갔고, 서비스도 획기적으로 개선돼 국내 금융기관 중 수신고 1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고객감동'이 얼마나 큰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가를 다시 한 번 확신하게 된 순간이었다.
요즘 세태를 보면 고객감동이 마치 계산된 웃음과 잘 다듬어진 매너를 뜻하는 것처럼 변질되어 있다고 느낀다. 일부 백화점을 가 봐도 그렇다. 대부분의 직원들이 친절한 듯 보이지만 물건을 사지 않고 되돌아 나오는 손님을 대하는 태도에서는 조금씩 차이가 난다. 처음과 변함없는 밝은 얼굴, 명랑한 목소리로 상냥하게 인사하는 곳이 있는가 하면 왠지 모르게 불편한 분위기를 뒤통수에서 느끼게 하는 곳도 많다.
진정한 고객감동은 진실한 마음과 그에 따른 행동이 있을 때만 가능한 것이다. 겉치레적인 미소와 친절을 보이는 고객감동보다는 투박하지만 구수한 입담이 훨씬 낫지 않은가.
지금은 '상품'보다 '기업가치'를 파는 시대다. 기업가치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최고의 품질, 최상의 서비스가 밑바탕이 돼야 할 것이다. 진정한 최고로 평가 받고, 고객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필요한 것은 경영진과 종업원들이 함께 보여주는 '진실한 행동'이다. 20여년 전 우연히 만난 그 버스안내양처럼 말이다.
이종석 휴켐스(주)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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