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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가을이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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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가을이 열린다

입력
2002.10.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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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햇살에는 그리움이 담겨 있다. 눈이 아리도록 고운 하늘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온다고 약속한 사람도 없는데 누군가 내 창문을 두드릴 것만 같다. 서늘한 벽에 등대고 돌아서면 누가 섭섭하게 한 것도 아닌데 그냥 서럽다.얼마 전 TV 뉴스를 보다가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화면에는 폐허가 된 마을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비치고 있었다. 수해 소식이었다. 아나운서는 수해로 집과 가산을 몽땅 잃은 한 여중생이 보낸 편지를 읽고 있었다. 당연히 힘들다는 내용일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뜻밖에도 감사의 편지였다. 졸지에 삶의 터전을 잃고 복구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실의에 빠져있을 때 도와준 자원 봉사자들에게 보내는 애틋한 보은의 편지였다. 봉사자들의 헌신적인 도움이 여중생 가족의 절망을 희망으로 바꿔주었다는 사연을 듣는 데, 내 가슴에는 따뜻한 물살이 밀려들었다. '그래도 내가 사는 이 세상은 따뜻하구나!' 느끼는 순간 내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코끝이 매워졌다.

어디서 그 많은 사람들이 동화책 속의 천사처럼 나타나 수재민들에게 힘을 주었을까? 땡볕 아래서 악취가 나고 흉물스러운 쓰레기 더미를 치워내어 길을 열고 먹거리를 준비하는 자원 봉사자들의 얼굴은 밝고 맑았다. 어쩌면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수재민들이 당한 재해에 비하면 아주 작은 일일 것이다. 그러나 봉사자들은 불시에 재난을 당해 황당하고 외로웠던 수재민들과 함께 있어줌으로써 그들에게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희망을 불어넣어 준 것이다. 희망만 접목된다면 이 슬픔도 힘이 될 것이다. 인간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재난이 아니라 그 일로 인해 희망을 잃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는 분명히 좋은 사람들이 더 많다. 수해가 난 지 두 달인데 아직도 수재의연금 기부자 명단은 깨알 같은 작은 활자로도 신문 전면에 가득하다. 성금 2,000원을 내는 TV의 전화모금에 천문학적인 숫자의 돈이 모여지는 것을 보고 있으면 우리 사회의 희망지수가 올라가는 것 같다. 여기에서의 돈은 곧 마음이다. 수재민들의 어려움을 함께 나누고 싶다는 좋은 사람들의 마음의 표시다.

도둑이 무서워 집안에서도 문을 몇 겹이나 걸어 잠그고, 행여 제 밥그릇 작아질까 봐 전전긍긍하며 이웃을 의심하고 일상을 견뎌야 하는 어두운 세상이다. 여중생의 감사편지 한 장으로, 갑자기 내 주변에 환하게 불이 켜지는 듯 했다. 그리고 새삼스럽게 내 주변을 친근한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위기감을 느끼며 살아가는 이유는 날마다 매스컴에서 홍수처럼 쏟아지는 흉보만을 접하기 때문이다. 눈만 뜨면 살인 사기 사고와 전쟁을 방불케 하는 치열한 정치공방 등 충격적 소식들만 우리를 협박하고 있다. 신문을 읽다가, TV뉴스를 보다가 분노하고 절망하다 보면 우리 사회에는 정말 아무 구원이 없어 보였던 것이다.

수마가 할퀴고 간 땅에도 우직하게 가을은 또 왔다. 여름 내내 불던 몹쓸 바람과 넘치던 비 속에서도 고맙게 살아남은 살찐 과육들이 대견하고, 지평선을 가득 메우며 토실토실 익은 벼 이삭들이 든든하다. 내 마음의 빈 곳간도 흐뭇하게 차오른다. 역경을 겪고 나면 별 좋을 것도 없는 현재를 고마워할 줄 아는 넉넉한 마음을 갖게 된다.

"이제 다시 일으켜 세우면 돼요" TV뉴스 끝 무렵, 쓰러진 벼 이삭들을 다잡아 세우는 농부의 햇살 같은 웃음이 황금벌판 위로 퍼져 나간다. 여름 동안의 수고와 비탄을 훌훌 내려놓은 농부는 오히려 안타깝게 바라보는 우리를 격려해주고 있었다.

그들에게 릴케의 시 한 구절을 보내드린다.

…마지막 열매들이 영글도록 명하시어/ 그들에게 이틀만 더 남극의 따뜻한 날을 베푸시고/완성으로 이끄시어 무거운 포도송이에 마지막 단 맛을 넣어주십시오….

/ 박 명 희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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