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의 승패는 1노3김 구도가 굳어지는 순간 이미 정해졌다고 생각했다. 김영삼(金泳三) 김대중(金大中) 두 사람이 후보 단일화에 실패하는 순간 민주 진영의 승리는 아득히 멀어졌다는 게 당시의 내 판단이었다. 민정당은 처음부터 끝까지 어부지리(漁夫之利)를 노렸다. 노태우(盧泰愚) 후보는 김영삼 후보가 강세를 보일 때는 김영삼 후보를, 김대중 후보가 상승세를 그릴 때는 김대중 후보를 견제했다.11월28일에는 노 후보에게 유리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라크의 바그다드를 출발, 방콕으로 향하던 KAL 858편이 버마(현 미얀마) 근해 상공에서 공중 폭발했다. 탑승객 115명은 전원 사망했다. 정부 여당은 KAL기 폭파범 김현희(金賢姬)를 선거 전날 한국으로 압송, 국민의 안보 심리를 자극하는 등 이 사건을 철저하게 선거에 이용했다.
선거 기간 중 나는 초연한 상태였다. 딱히 어느 누구를 지원할 입장이 아니었다. 나는 지극히 객관적인 관전자의 위치에 있었다. 그 때문인지 선거 기간 중 많은 사람들이 내게 찾아 와 선거 전망을 묻곤 했다. 미국의 개스턴 시거 국무성 차관보와 에드워드 더윈스키 백악관 특별보좌관, 스티븐 솔라즈 미 하원의원 등이 나를 찾았다. 서울에 있는 각국 외국 대사들도 내 의견을 물어 왔다.
그때 나는 분명하게 대답했다. "3김씨가 저렇게 나뉘어 싸우는 상황에서는 여당 후보가 백번 유리하다. 게다가 여당은 막대한 조직과 자금을 갖고 있다. 현재의 4자 대결 양상은 여당으로서는 최선의 선거 구도이다."
12월16일 대선 결과는 내 예상대로 3김씨의 완패였다. 노태우 후보는 828만2,000여표를 얻어 36.6%의 지지율로 당선됐다. 김영삼 후보는 633만7,000여 표, 김대중 후보는 611만3,000여표, 김종필 후보는 182만3,000여표였다.
1988년 2월25일 제6공화국이 출범했다. 그리고 4월26일 13대 총선이 있었다. 13대 총선은 16년 만에 소선거구제로 치러졌다. 결과론이지만 민정당이 소선거구제 법안을 통과시킨 게 실수였다.
민정당은 전체 의석 299석 가운데 전국구를 포함해 125석을 얻은 데 그쳤다. 평민당이 70석, 통일민주당이 59석, 신민주공화당이 35석을 각각 확보했다. 헌정 사상 처음으로 여소야대 국회가 탄생한 것이다.
대선 결과를 보면 13대 대선은 철저한 지역 선거 양상을 띠었다. 노태우 후보는 대구와 경북서 69.8%와 64.8%를, 김영삼 후보는 부산과 경남에서 55%와 50.1%를, 김대중 후보는 광주와 전남에서 93.8%와 87.9%를, 김종필 후보는 충남에서 43.8%의 지지를 받았다.
13대 총선도 13대 대선과 마찬가지였다. 호남에서의 전패를 예상한 민정당은 대구 경북에서의 전승을 위해 지역 감정을 최대한 이용했다. 관권 금권 선거도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나는 대구 달서구에 다시 출마했다. 사실 출마 준비를 하는 동안 나는 진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다. 또 어떻게 해서든지 당선이 돼야 했다. 내가 떨어지면 국민당은 끝장이기 때문이었다. 당시 선거법은 국회의원을 1명도 내지 못한 정당은 자동으로 해체하도록 돼 있었다.
그러나 지역 출신인 노태우씨가 대통령에 당선된 마당이어서 대구에서는 민정당이 엄청난 기세를 올리고 있었다. 솔직히 민정당 후보가 아니면 명함을 내밀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전력을 다했지만 결국 나는 민정당 후보에게 졌다. 이로써 국민당은 해체됐다. 선거 직후 나는 대구시민회관 옆 광장에서 부정선거로 인해 억울하게 낙선한 야당 후보들과 함께 부정선거 규탄대회를 갖고 울분을 삭여야 했다.
다시 원외 신세가 된 나는 서울로 올라와 정동에 조그마한 사무실을 하나 얻었다. 그리고는 26년간의 정치 생활을 되돌아 보며 독서와 집필로 세월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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