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대의 '살인 사기극'으로 국민적 관심을 모았던 '수지 김 살해사건' 1심 공판이 남편 윤태식(尹泰植)씨의 살인 혐의를 인정하는 것으로 일단락됐다.윤씨는 1987년 홍콩의 한 아파트에서 아내를 목졸라 죽인 후 범행이 드러날 것을 우려, 싱가포르 주재 북한 대사관으로 망명을 시도하다 여의치 않자 아예 사건을 '납북 탈출극'으로 조작한 혐의로 지난해 11월 구속기소됐다. 범행 후 윤씨는 "북한이 공작원인 수지 김을 이용, 나를 북한으로 납치하려 했으나 다행히 탈출에 성공했다"고 주장했고 당시 안기부는 공안분위기 조성에 활용할 목적에서 살인범인 윤씨를 반공주의자로 둔갑시켰다.
윤씨는 안기부의 지원을 배경으로 패스21을 설립하는 등 벤처기업가로 승승장구했고 이 과정에서 정·관계에 로비를 벌인 사실이 드러나 지난해 '윤태식 게이트'로까지 사건이 비화하기도 했다.
윤씨는 그간 공판과정에서 로비 및 사기행각에 대해서는 대부분 혐의를 시인했으나 살인 혐의에 대해서만은 끝까지 무죄를 주장했다. 윤씨는 "나와 다투던 수지 김이 흥분해 뛰쳐나가면서 벽에 부딪쳐 쓰러진 폭행치사 사건으로 살인이 아니다"며 "살인 혐의를 입증할 어떤 증거도 없다"고 강변했다.
재판부는 그러나 '외국의 권한 있는 수사기관이 작성한 조서나 서류도 증거로 삼을 수 있다'는 형사소송법 규정을 인용, '끈 압박에 의한 질식사'를 사인으로 판정한 홍콩경찰의 부검보고서를 살해 혐의의 결정적 증거로 채택했다.
징역 18년이란 적지 않은 형량에도 불구, 간첩가족으로 몰려 고초를 겪어야 했던 수지 김의 유족들은 판결에 극도의 불만을 표출했다. 특히 재판부가 형 감경의 사유로 "피고인도 오랜 기간 불안과 초조 속에 많은 고통을 겪었을 것으로 짐작된다"고 지적한 것과 관련, "15년 동안 부와 권력을 누렸는데 무슨 불안 초조냐"며 반발했다.
/노원명기자 narzi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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