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계 부실화에 브레이크가 작동하지 않고 있다. 올초부터 가계부채 급증에 대한 경고가 누차 제기됐지만, 가계대출 연체율은 바닥을 모르고 급상승하고 있고, 개인파산 신청건수는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다. 이에 따라 '가계발(發) 신용위기→소비위축→경기침체'의 시나리오가 현실화하고 있다는 우려가 높다. 일각에서는 "한국경제가 '가계 붕괴로 인한 장기 불황'이라는 일본의 전철을 되풀이 할 수 있다"는 경고도 나오고 있다.▶부실화 속도는 위험수위
각종 지표들을 보면 가계 부실화 정도는 외환위기 이후 최악이다. 은행권 가계대출(신용대출+담보대출) 연체율은 지난해말 1.21%에서 9월말 1.56%로 9개월만에 30% 급증했다. 특히 신용카드 부문은 지난 7월(10.12%) 10%대로 올라선 뒤 9월말 11.19%로 매달 신기록을 내고 있다. 신용카드 현금서비스 한도가 줄어 '돌려막기'가 힘들어졌고, 금융기관에 대한 가계대출 건전성 기준도 강화하면서 연체율 급증세는 최소한 내년 상반기까지 이어질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가계부실화 정도를 가늠할 수 있는 보다 직접적인 지표인 개인파산 신청건수와 신용불량자 수를 보면 상황은 더 심각하다. 올들어 7월까지 법원에 접수된 개인파산 신청건수는 548건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46.1% 늘어났다. 8월말 현재 개인신용불량자수도 238만명으로, 갓난애를 포함해 국민 100명중 6명이 정상적인 금융활동이 제약받고 있는 상황이다. 삼성경제연구소 권순우(權純旴) 박사는 "선진국과 대비해 가계대출 절대수준 자체가 우려할 만한 것은 아니다"면서도 "그러나 부실화 속도가 너무 빠르기 때문에, 브레이크가 안 걸릴 경우 최악의 상황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일본식 불황 가능성
문제는 금리가 급등하거나, 부동산 거품이 꺼질 경우 지금의 국민경제 자금순환 구조(저금리→가계대출 증가→부동산가격 상승→소비 활성화)가 일시에 반전될 수 있다는 것. 금리가 오르면 가계 이자부담이 늘어나, 가계의 상환능력이 급격하게 떨어지고, 여기에다 집값마저 급락하면 담보가치 하락으로 금융권이 대출회수에 나설 수 밖에 없다. 이 경우 '가계부실 급증→금융기관 부실화→가계·기업에 대한 대출회수→신용경색·소비위축→경기침체'의 악순환 구조로 빠져들 수 있다.
이 같은 현상은 이미 일본에서 확인된 것이다. 일본은 1980년대말 주택값이 폭락하고, 금리가 단기간에 치솟으면서 집을 담보로 돈을 빌린 사람들이 채무상환 불능사태에 빠지고, 이는 민간소비를 위축시켜 일본경제를 장기불황에 빠뜨렸다.
최근 하나경제연구소는 한국경제가 일본식 장기불황의 초입국면에 들어섰다며 주택보급률이 100%에 달하는 데도 대도시를 중심으로 부동산가격이 급등하고 저금리 기조속에서 통화량이 급팽창하며 금융기관이 기업대출을 대신해 가계대출에 앞장서고 있다는 점 공통점을 근거로 들었다. 금융연구원 관계자는 "기업발(發) 신용대란에 따른 경제위기를 극복하는데 일등공신이었던 가계 대출, 가계 소비가 이제 우리 경제를 장기침체로 몰고 가는 뇌관으로 작용하고 있다"며 "한국경제가 일본식 불황으로 가느냐 마느냐는 기로에 서있는 것만은 분명하다"고 말했다.
/유병률기자 bryu@hk.co.kr
■"금리 올려 급한 불 끄자" "담보줄여 속도조절하자"/韓銀-재경부, 해법 이견
가계부실이 위험수위에 들어섰다는 점은 인정하면서도, 그 해법을 놓고 관련 부처와 경제 전문가들간 의견이 분분하다. 한국은행 등은 "더 이상 미세조정으로는 안된다. 선제적인 금리인상으로 가계 부실의 불씨를 끄지 않을 경우 더 큰 화를 자초할 것"이라며 금리인상을 통한 '조기 진화(鎭火)론'을 주장하고 있다.
한은 관계자는 "미봉책으로만 대응한다면, 어떤 정책수단도 통하지 않는 상황에 빠질 수 있다"며 "가계부채 급증의 원인인 저금리 기조를 전환해야 한다"고 말했다. 금리인상에 따른 어느 정도 충격은 불가피하겠지만, 지금 금리를 올리지 않는다면 세계경제 침체로 앞으로는 금리인상이 더욱 힘들어질 것이라는 논리다.
금감원이 지난달부터 투기지역에 대한 주택 담보비율을 60%로 제한했지만, 실제 대출가능금액은 거의 줄지 않았다는 점도 한은측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그러나 재경부·금감원 등은 금리를 인상할 경우 "불난 집에 기름을 끼얹는 꼴"이라며 여신심사강화·담보비율 추가인하 등을 통한 '속도조절론'을 강조하고 있다. 금감원에 따르면 지금 상황에서 금리를 0.5%포인트 인상할 경우 주가는 10%, 대출은 20% 축소하는 것과 같은 충격을 초래하는 것으로 분석됐다.
금감원 관계자는 "아직 가계대출은 위험수위가 아니기 때문에, 어떻게 소프트랜딩(연착륙) 시키느냐가 관건"이라며 "섣불리 금리를 인상할 경우 한계상황에 도달한 저소득층부터 집중적인 타격을 받을 뿐"이라고 말했다.
/유병률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