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 화려하지도 않고 상대를 압도하는 카리스마도 없어 보인다. 서양인으로는 비교적 작은 체구에 매무새도 단정하다. 할리우드 스타라기 보다는 미국의 평범한 젊은이 같다. '굿 윌 헌팅' '리플리' '오션스 일레븐' 등에서 지적이면서도 분위기 있는 배역을 소화한 맷 데이먼(32).그가 이번에는 '본 아이덴티티'(The Bourne Identity)에 출연했다. 첫 액션영화다. 기억상실증에 걸린 미 중앙정보국(CIA) 요원 제이슨 본으로 총을 맞은 채 바다에 버려졌으나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뒤 자신이 누구인지를 찾아간다. 18일 국내 개봉에 앞서 8월23일 대만 타이베이(臺北)에서 아시아 시사회를 겸한 기자회견을 가졌다.
영화에는 액션이 많다. 경찰의 추격을 따돌리기 위해 자동차로 골목길을 내달리고, 암살자와는 목숨을 건 격투를 벌인다. 이런 장면에서는 스턴트맨의 도움이 컸다. 자동차에 두개의 핸들을 설치, 오른쪽에 앉은 스턴트맨이 핸들을 돌리면 왼쪽에 앉은 그가 그대로 따라 했다. 15m 높이의 건물 벽을 맨손으로 타고 내려올 때는 보이지 않는 줄에 몸을 묶었다. 물론 그가 쏟은 노력도 적지 않다. 경찰에서 총기 훈련법을 배웠고, 가라데와 킥복싱을 섞은 '칼리'라는 새로운 무술도 익혔다. 하루 12시간이 넘는 격투 장면을 찍으면 온 몸은 멍투성이. 그는 "다행히 크게 다친 적은 없다"며 웃는다.
영화 속의 제이슨은 치밀한 추리력과 빠른 두뇌회전이 무기다. 맷 데이먼이 이 영화가 '현실성'의 측면에서 기존 액션물과 차이가 많다고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전통 액션물은 시작부터 총을 쏘고 시도 때도 없이 폭탄을 터뜨리며 주인공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초능력의 소유자입니다. 그러나 '본 아이덴티티'에서는 운전을 하려면 지도를 먼저 보고 대사관에 들어갈 때는 총 대신 지도와 무전기를 준비합니다. 이런 장면이 영화의 현실성과 스토리를 살려줍니다."
그는 영화에 대한 입장이 비교적 뚜렷한 배우로 알려져 있다. 연기자와 감독의 관계에 대해서는 "영화는 공동작업"이라는 말로 요약한다. 배우는 감독이 시키는 대로만 할 게 아니라, 연기에 대한 분명한 입장이 있어야 하며 감독 또한 그런 의견을 무조건 배척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끔찍한 가정이겠지만, 주인공처럼 기억상실증에 걸린다면 가장 잊기 싫은 기억은 무엇이고 잊고 싶은 기억은 무엇일까. "'굿 윌 헌팅'으로 유명세를 타던 당시가 잊고 싶지 않은 기억입니다. 그러나 4년 전 대통령을 위한 '굿 윌 헌팅' 캠프 데이비드 시사회는 정말 잊고 싶어요. 시사회가 끝나고 화장실에 갔는데 클린턴 대통령이 있어서 차마 들어가지 못하고 그가 어서 나오기만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볼 일을 보고도 세면대에서 손을 씻고 얼굴을 가다듬으며 시간을 끌더군요. 잊고 싶은 황당한 기억입니다."
하버드대 영문학과를 중퇴한 그는 각본도 쓰고 있으며, 감독도 되고 싶다. 각본은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마다 써서 모으고, 감독들에 대한 자료도 많이 수집했다. 로버트 러드럼의 3부작 소설을 영화화한 이 영화는 6월 미국에서 개봉해 1억1,000만 달러가 넘는 비교적 괜찮은 흥행 성적을 올려 벌써부터 속편 제작이 논의되고 있다. 맷 데이먼은 "각본이 좋다면 속편에도 꼭 출연하고 싶다"고 말한다.
/타이베이=박광희기자 khpark@hk.co.kr
● 본 아이덴티티
본(Bourne)의 정체(Identity)는? 한 남자가 지중해에서 총상을 입은 채 표류하다 어부에게 구출된다. "당신은 누구요?"라고 묻는 어부에게 기억상실증에 걸린 남자는 말한다. "나도 모릅니다."
유일한 단서는 엉덩이 살 속의 작은 레이저기기에 입력된 스위스 은행계좌번호 뿐. 은행개인금고에서 발견한 수많은 국적의 여권, 누군가 자신을 끝없이 죽이려 한다는 사실이 그를 더욱 혼란스럽게 한다. 영어를 사용하고, 뛰어난 무술실력을 가졌고, 천부적인 위기대처능력을 가진 그는 과연 누구인가.
더그 라이먼 감독의 '본 아이덴티티'는 누가 왜 자신을 죽이려 하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제임스 본(맷 데이먼)의 자기찾기 과정을 스위스 체코 프랑스를 배경으로 미스터리 형식으로 그려간다. '트리플 X'처럼 요란한 액션이나 '007시리즈'처럼 기발한 발상이나 세련된 캐릭터는 없다. 게다가 우연히 만난 여자와 공동운명이 되고, 사랑을 이룬다는 상투적인 설정.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꽤나 독특한 매력을 풍긴다.
지적인 이미지의 맷 데이먼이 보여주는 리얼 액션의 새로움 때문만은 아니다. 본이 살던 아파트, 사용한 전화번호 등을 토대로 퍼즐을 맞추듯 자신의 정체를 조금씩 찾아가는데 따라 그를 없애려는 미국 비밀첩보기관인 드레스톤의 존재를 조금씩 드러내는 나선형 구조, 그 속에 담긴 미국의 부도덕한 암살 음모와 그것을 감추려는 추악한 이중성이 '본 아이덴티티'를 가벼운 오락물이 아닌 지적인 액션 스릴러물로 만든다.
/이대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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