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몇 가닥 가는 선만 보여 무엇엔가 긁힌 자국인줄 알았죠. 벽에 엉겨붙은 때를 조심조심 벗겨내고 나니 초승달 모양의 눈썹에 미소 띤 붉은 입술, 분홍빛 피부를 한 사람의 얼굴이 드러나는데 순간 숨이 턱 멎는 것 같았습니다." 북한 황해북도 연탄군 송죽리 고구려 고분의 벽화 사진을 첫 공개한 나가시마 기미치카(永島暉臣愼·61) 일본 고구려회 회장은 9일 "마자상(馬子像) 벽화를 처음 발견했을 때 이루 말할 수 없는 감동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통상 고구려 벽화에서는 웅혼(雄渾)한 힘이 느껴지는데 이 인물상은 너무나 섬세하고 아름답다"면서 "고구려인의 또 다른 면모를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라고 평했다.
송죽리 고분은 나가시마 회장이 지난달 7∼21일 북한 사회과학원과 공동으로 발굴한 고구려, 낙랑 고분 6기 가운데 유일하게 벽화가 발견된 무덤이다. 양식(洋食) 나이프를 구부리고 날을 갈아 만든 자신만의 발굴도구로 송죽리 고분 발굴에 참여했던 그는 "북한 조사단원 50여명이 똑 같은 제복에 똑 같은 모자를 쓰고 현장에 나타나 처음에는 낯설고 당황했다"고 전했다. "북한 조사원들은 이렇다 할 발굴 장비가 없어 맨손에 삽 하나 들고 땅을 판다. 발굴된 유물들 가운데는 풍화 등으로 물렁물렁해진 것들이 적지 않다. 일본에서라면 바로 응고제를 쓰는데 북한에서는 그런 약제가 없어 후손에 물려줄 귀중한 유물을 발견하고도 수습하지 못한 경우도 있어 매우 안타까웠다."
송죽리 고분 벽화의 보존처리도 걱정거리다. 현실(玄室·널방) 천장이 무너져내리고 오래 전 도굴된 뒤 방치돼온 탓에 벽화의 상당부분이 산화로 훼손된 상태다. 북한 사회과학원에서 보존처리 방안을 검토 중이라지만 경제난으로 당장 조치를 취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그는 "그동안 북한 고구려벽화 보존 지원사업을 펼쳐온 화가 히라야마 이쿠오 선생이 유네스코에 지원을 요청할 계획"이라면서 한국에서도 관심을 가져줄 것을 당부했다.
나가시마 회장이 일본이 아닌 한국에서 자료를 첫 공개한 까닭은 뭘까. 그는 "남북한 학자들과 달리 나는 양쪽 모두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특혜'를 누리고 있다"면서 "마침 북한에서 귀국하자마자 부산대 박물관에서 강연 요청을 해왔길래 문화교류의 중재자 역할을 하고 싶어 북한에 연락해 공개 허락을 받았다"고 털어놓았다.
스스로를 '고구려 사람'이라고 부르는 나가시마 회장은 오사카 외국어대 조선어학과 재학시절 일제 때 경주박물관장을 지낸 아리미츠 교토대 교수의 강의를 듣고는 한국고고학으로 전공을 바꿨다. 그는 86년 일본에서 열린 '북한 고구려 문화전'을 계기로 출범한 일본 고구려회의 창립회원으로 참여했다. 지난해 20여년간 몸담았던 오사카 문화재협회에서 정년퇴임한 뒤 올 7월 고구려회 회장을 맡은 그는 첫 사업으로 고분 공동발굴을 성사시켰다.
나가시마 회장은 "북한 사회과학원과향후 고분을 비롯한 유적의 공동발굴 및 조사 사업을 지속적으로 벌이기로 합의했다"면서 "이번 발굴에는 나 혼자 참여했지만 앞으로는 젊은 연구자를 많이 참여시키겠다"고 말했다. 그는 또 "최근 일본인 납치 문제로 일본에서는 북한에 대한 감정이 매우 좋지 않다"면서 "이번 발굴성과를 알리는 강연을 통해 일반인들이 고구려 문화는 물론 북한 사회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10일 울산에서 시민강연을 갖고 12일 출국한다.
/부산=이희정기자 jaylee@hk.co.kr
■ 황해도 송죽리 벽화고분
지금까지 발견된 고구려 벽화 고분은 중국 지안(集安)의 20여기를 포함해 100여기에 이른다. 3세기에 첫 등장한 고분 벽화는 생활풍속도가 주류를 이루다가 장식문양을 거쳐 후기로 가면 죽은 자의 영혼을 보호하는 사신도(四神圖)로 발전한다. 송죽리 고분은 수렵도 행렬도 인물상 등 생활풍속을 담은 벽화가 그려져 있고, 연도와 전실(前室), 사이 통로, 현실로 이어지는 무덤 구조로 볼 때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전반께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또 규모가 입구에서 현실 끝까지 길이 8m, 너비 3m, 봉분 직경 30m에 달하고, 은으로 만든 뒤꽂이, 은을 덧씌운 관 못 등이 출토된 것으로 보아 왕족 또는 귀족층의 무덤으로 보인다.
이 고분은 이미 도굴되고 현실 천장이 무너진 채 방치돼 현실 벽화 대부분이 산화와 박락으로 훼손된 상태다. 그러나 천장 돌이 덮여있던 전실의 벽화들은 군데군데 떨어져나가기는 했지만 상태가 양호해 보존처리를 잘 하면 원형에 가깝게 복원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특히 전실 동쪽 벽에서 발견된 '마자상'은 기존 고구려벽화에서 볼 수 없던 섬세한 필치와 은은한 색채로 관심을 끈다. 나가시마 회장은 "당대최고 화공의 솜씨로 보이는 이 그림은 송죽리 고분 내 벽화는 물론, 다른 고구려 벽화들과 비교해서도 최상급"이라고 말했다.
/이희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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