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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소년" 동네 대구 사령봉마을 찾아서/"길을 잃었다고요? 시골애들을 어떻게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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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소년" 동네 대구 사령봉마을 찾아서/"길을 잃었다고요? 시골애들을 어떻게 보고…"

입력
2002.10.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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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들은 모두 태권도를 좋아했다. 그 또래 여느 아이들 처럼 끓어오르는 장난기를 주체 못했고, 입가엔 늘 웃음기를 달고 다녔다. 1991년 3월 26일 오전8시10분. 대구 달서구 이곡동 '사령봉 마을'의 다섯 소년은 마을을 나섰다. 지방자치제 선거로 맞은 휴일 오전, 예정에 없던 의기투합이었다. 일없이 학교도 들렀고 개구리밥이 빡빡한 못을 찾아 물수제비도 떴다. 군 사격장 주변을 떼지어 얼쩡대던 소년들은 마을에서 3㎞ 남짓한 와룡산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소년들이 다시 산을 내려온 것은 정확히 11년6개월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소년들을 기다린 마을

소년들의 고향, 사령봉 마을은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논,밭 위로 도드라졌던 마을이 아파트 숲 사이로 우묵이 가라앉긴 했지만 잿빛 슬레이트 지붕과 삶의 고단함이 묻어나는 시멘트 담장은 소년들이 떠나던 날 아침 풍경, 그대로였다. 90년대 초 택지개발로 논밭이 수용됐을 때 자연부락은 보상 문제로 열외였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마을이 변해버리면 소년들이 집을 찾아 돌아오지 못할까봐 정부가 특별히 봐줬다"고 아직도 오해하고 있었다. 40대 주민은 "그땐 음주운전하다 걸려도 '개구리 삼촌'이라면 넘어갔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소년들이 주전부리를 해결했던 구멍가게는 그 때 그 여주인이 지키고 있었다. 여주인은 "92년에 우리 집에서 영화(돌아오라 개구리 소년)도 찍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10여년의 세월은 마을에서조차 소년들을 점차 잊게 했다. 박찬인(당시 10)네가 세들어 살던 단층 기와집 앞엔 놀이터가 들어섰고, 금요일 오후 놀이터를 찾은 아파트 아이들은 이 동네가 TV 속 그 개구리 소년들이 살던 곳임을 알지 못했다. 어렵게 찬인이 이름을 기억해낸 집 주인 김무술(80) 할머니는 "이제 (소년들의 이름을) 잊을 때도 됐지"라고 했다.

소년들의 가족은 대부분 이 마을을 떠났고, 최근 김종식(당시 9)네가 아버지가 세상을 달리한 뒤 이곳으로 돌아왔다. 마을을 벗어난 소년들이 내달렸을 논두렁은 곧게 펴져 아파트 단지를 가르는 경계가 됐고 논밭 위엔 아파트가 솟았다. 소년들이 사라지고 3,4년 뒤의 일이다.

■논밭은 아파트 숲이 되고

그날 오전 소년들은 마을을 떠나 성서초등학교를 거쳐 섬유공장과 항공대(航空隊) 입구, 선원지(仙源池)를 거쳐 와룡산으로 향했다. 경찰이 확보한 목격자들의 진술에 따르면 그날 소년들은 마을 아이들의 전형적인 나들이 길을 밟았다. 달리 갈 곳 없던 마을 아이들은 늘 그렇게 선원지에서 멱을 감고 개구리를 잡았다. 이웃한 50사단 사격장은 탄피, 탄알 줍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던 곳이다.

소년들이 지나쳤던 섬유공장 터엔 개발의 상징인 대형 쇼핑몰이 들어섰고 항공대가 떠난 자리엔 아파트 단지가 터를 잡았다. 소년들을 찾느라 물을 빼는 곤욕을 치르기도 했던 큰 못도 메워져 또 다른 아파트를 떠받치고 있다.

사격장 위에도 고층 아파트가 빽빽하고 사격장 과녁이 놓였던 곳엔 아파트 노인들을 위한 게이트볼장이 자리했다. 노인들은 따가운 가을 햇살을 받으며 게이트볼에 빠져 있었고 그 곳에 사격장이 있었음을, 소년들이 거쳐 갔음을 역시 알지 못했다. 시간의 폭은 10년이지만 변화의 깊이는 족히 30년이었다.

소년들은 그날 오후2시 와룡산 계곡의 하나인 불미골 입구에서 개를 키우던 김이수씨에게 마지막으로 목격됐다. 소년들의 유골은 그 곳에서 동쪽으로 직선거리 불과 400여m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발견됐다. 당시 경찰의 수색은 상식 바깥이었다.

■소년들이 살아서 오른 상엿길

소년들이 올랐을 중학교 뒤편 산길을 되짚어 불미골로 향했다. 마을 주민이 죽어 올라가던 상엿길이고, 나무꾼들의 길이었다. 소년들은 상엿길을 살아 올라가 죽어 내려왔다.

상엿길은 이내 산등성을 따라 난 나무계단 등산로와 연결됐다. 토박이들에 따르면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 뒤 나무꾼 길에다 나무계단을 박아 등산로를 만들었다. 한참을 오르자 체육 시설과 함께 안내 입간판이 나타났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산의 맥을 자르니 붉은 피가 솟았다"는 어느 산에나 있음직한 얘기와 "승천하려는 용을 보고 아녀자가 '산이 움직인다'고 방정맞은 소리를 해 용이 떨어져 와룡산이 됐다"는 두 얘기가 산세와 이름의 유래를 밝히고 있었다. 남쪽으로 등을 두고 똬리를 튼 와룡산이 지금 품고 있는 것은 여의주가 아니라 쓰레기 매립장이다. 머리를 서쪽, 꼬리를 동쪽으로 둔 와룡산에서 소년들의 유골은 꼬리쪽에서 발견됐다.

능선을 따라 난 등산로 아래가 돌연 바삭바삭, 왁자지껄했다. 의경들이 대거 동원돼 수색작업이 한창이었다. 11년 전 그들의 선배들도 그렇게 이 산을 헤맸었다. 당시 찾지 못한 그 무엇이 그 곳에 남아 있을 리는 만무했다.

■"여기서 얼어죽었다는게 말이 됩니까?"

40분 가량 등산로를 걷자 정자가 나타나고 그 10여m 아래로 경찰이 쳐놓은 흰 천막이 눈에 들어왔다. 의경 두 명이 가져갈 것 없는 유골 발견 현장을 지키고 있었다. "2시간씩 교대로 24시간 이곳을 지킨다"고 했다. 그곳을 지키던 수경은 "이 동네서 나고 자란, 소년들과 동년배"라고도 했다. 소감을 묻자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야들은 그때도 (누군지 모를 유괴범에게 아이들을 돌려보내 달라는) 편지 쓰고 캠페인 한다고 해가 귀찮게 하더니만 군대 와서도 이리 귀찮게 하네."

유골 발굴 10여 일이 지나면서 찾는 이는 줄었고 천막 아래서 누군가 갖다 놓은 다발 속 국화가 말라가고 있었다.

가끔 일없는 동네 사람들이 신발에 흙을 묻혀 가며 구경왔다. 이날도 이곳 토박이라는 청년 3,4명이 올라왔다가 경찰 욕을 쏟아놓고 돌아섰다. "여기서 얼어 죽었다는 게(저체온사를 이렇게 표현했다) 말이 됩니까. 여기서 다섯 구가 썩었으면 냄새가 나서라도 바로 아래 마을에서 알지요." 한 청년은 "초등학교때 저녁 먹고 서재(와룡산 서쪽 끝)까지 갔다 온 적도 있는데, 시골 애들을 어떻게 보고…"라며 도시 출신 기자를 흘겼다.

유골을 꺼내고 주변 흙까지 떼내면서 거의 1m 깊이로 파인 계곡 옆으로 상수리 나무들이 발굴현장을 시립하듯 섰다. 상수리 나무는 사람들이 미련스러웠을 것이다. 그 나무에서 도토리가 떨어졌고, 도토리를 주우러 온 등산객이 소년들의 유골을 발견했다.

현장 바로 아래 고등학교 신축공사장은 소년들 실종 당시 30호 남짓하던 서촌 마을 주민들의 텃밭이었다. 마을 옆으로는 골프연습장이 들어섰고 대형 식당이 즐비했다. 개발 이후 땅값이 뛰면서 논,밭을 부쳐먹던 이들은 땅부자가 됐고, 그들은 지금 고층 아파트에 살며 골프를 친다. 소년들도 그날 산에 가지 않았다면 그 중 몇은 개발의 덕을 톡톡히 봤을 것이다.

■'11년 무게'에 짓눌린 수사

소년들이 다니던 성서초등학교에서 몇m 떨어진 성서파출소 별관 2층엔 수사본부가 마련돼 있다. 모든 수사본부가 그렇듯 '11'자 모양으로 책상을 배열해 놓았다. 형사들은 11자 모양으로 배열된 책상에 앉아 11년 전 수사자료를 뒤적이지만 그들의 이마엔 11자 모양 주름만 그려졌다.

실종 당시 경찰은 "(이 얕은 산에서) 조난이란 있을 수 없다"고 했지만 지금의 경찰은 "조난의 가능성이 많다"고 한다. 수사본부 한 켠엔 실종 당시의 와룡산 일대 항공사진과 현재의 항공사진이 병풍처럼 나란히 펼쳐져 있었다. 산은 그대로지만 그 외의 것들은 그대로인 게 없다. 시간의 흐름을 3∼4배 앞서는 개발의 변화무쌍함에 경찰은 머리를 싸매야 했고 '정황상 타살'과 '물증 없는 타살' 사이에서 길을 잃었다.

형사들은 아침 회의가 끝나면 삼삼오오 목격자들을 찾아 나서고 저녁이면 다시 무거운 어깨를 늘어뜨리고 수사본부로 돌아온다. 수사본부의 한 형사는 "미궁의 출구로 알았던 곳이 새로운 미궁의 입구"라고 했다.

■기억 속에서 사라질 소년들

육탈(肉脫)로 돌아온 소년들은 여전히 미궁 속에 갇혀 있다. 하지만 소년들은 어느새 많이 잊혀져 있었다. 망각엔 가속도가 붙을 터였다. 곧 대부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밀어내어질 것이다.

소년들의 가벼운 주검과 함께 가끔 가슴을 쓸어 내리고, 주체 못하게 맥박을 뛰게 했던 다섯 소년들의 실종에 대한 기억은 소년들이 살던 마을과 소년들이 개구리를 잡고 놀던 못이 그러했듯, 곧 흔적 없이 아득해질 운명이다. 불안한 사회에 대한 기억도 덩달아 망각될지 모를 일이다.

2002년 올해만도 전국에서 5,000여명의 13세 미만 어린이가 실종됐고 300여명이 아직 제집을 못 찾았다.

/대구=이동훈기자 dh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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