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하(34)가 돌아왔다. 옆에 오렌지색 '포스트잇'(현대문학 발행) 하나를 달고서였다.1년 반 만이다. 그는 2001년 2월 장편소설 '아랑은 왜'를 펴냈고, 한동안 글쓰기와 좀 멀리 있었다. 그동안 라디오의 책 소개 프로그램 진행자로 이름을 날렸다. 스스로도 "나는 방송을 너무 잘해요"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러다가 올해 초 단편을 쏟아놓겠다고 선언했다. 계절마다 작품을 발표했다.
앞으로 너댓 편을 더 발표해 내년 중 창작집을 묶겠다고 했다. 장편 구상을 위해 과테말라로 떠날 계획도 잡고 있다. 방송도 그만두려고 한다. "주간 진행이라면 생각해 보겠다"는 단서를 달긴 했지만.
그는 산문집 '포스트잇'을 펴내면서 "소설가의 몸을 타고 난 것을 알게 됐다"고 했다. "다른 어떤 방식보다도 글로 세상과 소통할 때 영혼의 교감이란 것을 느낀다. 예전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감정이다." 그래서 그는 소설가로 돌아왔다.
산문집은 내밀하고 진솔한 작가의 모습이다. 카메라를 통해 본 장면만을 기억하며, 컴퓨터의 불필요한 파일을 삭제하기를 즐기고 가장 선뜻 사는 책으로 여행가이드북을 꼽는 사람. 그는 또한 직업군인이었다가 은행 예비군대장을 명예퇴직한 뒤 막노동을 시작하면서 마음이 너무나 편해졌다는 아버지의 아들이다. 누구 앞에서건 청산유수로 말을 잘하는 이 작가가 정말은 자신이 수줍고 내성적인 사람이라고 털어놓는다. '아무 흔적없이 떨어졌다 별 저항없이 다시 붙는, 포스트잇 같은 관계'를 꿈꾼다는 그이다. 그가 맺는 관계가 포스트잇 같지 못하다는 의미다. 김씨는 사실 "스스로 '부탁해요'라는 말을 못하는 대신 누군가 '부탁해요'라고 말할 때 거절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매끈한 댄디 속에 촌놈이 살고 있는 셈"이라면서 웃는다.
평론가 김병익씨가 '콤플렉스 없는 세대'라고 부르는 30대 작가는 어떤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까. 인터넷이 낙원인 줄 알았던 그는 어느날 그것이 거대한 거짓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터넷이 노래하고 목욕하는 우리의 행위를 변화시켰는가? 인터넷은 아무 것도 바꾸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인터넷과 문학의 공모를 믿지 않는다." 삐삐를 소재로 한 소설 '호출'(1997)을 발표했을 때만 해도 그는 세상의 흐름을 너무 급하게 따라가는 것은 아닌지 걱정했었다. 그 삐삐가 몇 년새 거의 사라져 버렸다. 세상의 속도를 따라가면서 동시에 그 속도를 사유해야 하는 과제를 안은 소설가는 고민한다.
"예전에는 소설가가 좋은 가방이나 구두를 만드는 장인과 같다고 생각했어요. 나는 소설 뒤에 숨어서 진짜 모습을 가렸죠. 내 이야기를 소설로 쓰려고 하지 않았어요." 그런 김씨가 산문집에서 솔직하게 자기 얘기를 하면서, "창작과의 오랜 싸움을 위한 실탄이 많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부끄러움 많았던 유년기를 소설로 쓴 적도 없고, 군화에 광 내면서 시간을 보낸 헌병대 시절을 쓴 적도 없었다. 몇 번의 연애 얘기도, 아버지 얘기도 쓴 적이 없다. 산문을 쓰면서 그는 자신이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한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알게 됐다. 그는 이제 이 체험들을 잘 숙성시켜서 소설의 옷을 입혀 세상에 내보낼 참이다.
/김지영기자 kimj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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