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동일범에 의한 범행으로 보이는 무차별 연쇄 저격 공포에 떨고 있다. 최근 5일 사이 워싱턴과 인근 메릴랜드주 등지에서 6명이 숨지고 1명이 중상을 입은 데 이어 7일 8번째 피해자가 나오면서'얼굴없는 스나이퍼(저격수)'에 의한 공포가 점점 커지고 있다.
▶8번째 피해자
7일 오전 8시께 메릴랜드주 프린스 조지 카운티의 부위시 소재 벤자민 타스커 중학교 앞에서 등교길의 소년(13)이 총격을 받은 사건도 이전 범인과 동일범의 소행으로 밝혀졌다. 미 연방 주류·연초·총포국(FATF)측은 피해 소년의 몸에서 빼낸 총탄을 조사한 결과 이전 피해자들의 것과 같은 종류로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에 앞서 2일 저녁부터 3일까지 발생한 무차별 저격 살인으로 워싱턴 시내에서 1명, 메릴랜드주 몽고메리 카운티에서 5명 등 6명이 숨졌으며 4일 버지니아주 스캇실바니아 카운티에서 여성 1명이 중상을 입었다.
▶사건의 특징
범인에 의해 무작위로 선정된 무고한 시민들이 피해를 보고 있다는 것이 이번 사건의 가장 큰 특징이다. 피해자들은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거나 정원의 잔디를 깎는 등 일상생활을 하다가 발사지점을 알 수 없는 거리에서 날아온 한 발의 총탄을 맞았다. 피해자들의 인종·연령·성별도 백인 남자, 인도계 택시 운전사, 히스패닉계 여성, 백인 여성, 흑인 소년 등으로 다양해 이들 사이에 어떤 공통점이나 연관을 찾기도 어렵다.
워싱턴 포스트는 이번 사건은 범행 의도가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1977년 6월부터 13개월 동안 주로 데이트 하는 젊은 커플을 골라 13명의 사상자를 낸 '샘의 아들'사건이나 극단적인 문명 혐오론자 테드 카진스키가 16년 동안 23명을 대상으로 범행을 했던 '유나바머(Unabomber) 사건'과도 성격이 다르다고 지적했다.
▶오리무중의 범인
범인은 피해자들의 몸에 박힌 0.223 구경 총탄 외에는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고 있다. 경찰은 이 총탄이 M16을 개조한 소총에서 발사됐을 것으로 보고 있다. FATF의 조세 리엘 대변인은 "보통의 사격 실력을 갖고 있는 사람은 이 총을 사용해 135m 떨어진 곳의 목표물을 맞출 수 있으며, 사격에 능숙할 경우 그 거리를 585m까지 늘릴 수 있다"고 설명했다. 특수 사격 훈련을 받은 사람으로 범인을 한정할 수 없다는 얘기다.
범인이 한 명인지, 여러 명인지도 불분명하다. 다만 범행 현장 중 한 곳에서 흰색 박스 트럭에 두 사람이 타고 떠나는 것을 봤다는 목격자의 진술을 근거로 한 사람은 운전을 하고 다른 사람은 저격을 하는 '2인 1조'범행일 가능성이 거론되고 있다. 경찰당국은 "두 명의 범인들이 먼 곳에 차를 세워놓고 망원경이 달린 소총으로 조준사격을 한 뒤 달아났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답보상태의 수사
100여 명의 카운티 수사관, 50여명의 FATF 요원에 연방수사국(FBI) 요원들까지 수사에 가담했지만 범인의 윤곽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경찰에 접수된 총 4,000여 건의 제보에도 범인의 얼굴이나 소재를 파악할 만한 결정적인 단서는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수사당국은 이번 사건의 범인으로 테러범 연쇄 살인범 스릴 킬러(thrill killer) 등 세 갈래를 상정하고 있다. 그러나 수사당국은 테러범은 통상 사건 후 범행의 목적과 신분을 밝힌다는 점에서 테러의 가능성은 높지 않다고 보고 있다. 또 단시일에 다발적으로 일어나 장기간에 걸쳐 공통된 특정을 가진 인물을 대상으로 하는 기존 연쇄 살인의 방식과도 다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공포 확산
누구나 저격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희생자가 가장 많이 발생한 메릴랜드주는 물론 수도 워싱턴과 버지니아주의 주민들은 거의 패닉(공황) 상태에 빠져들고 있다. 사건 현장 주변의 주민들은 외부 활동을 아예 기피하는 현상마저 보이고 있다.
소년 피격 사건 직후 몽고메리 카운티와 프린스 조지 카운티의 각급학교에는 5단계 경보태세 가운데 4번째인 '코드 블루'가 발동돼 야외활동 중단 지시가 내려졌고 교문을 걸어 잠갔다. 인근 워싱턴과 버지니아주 등에서도 등하교 시 학부모의 동행을 권장하는 등 공포감이 급속히 퍼지고 있다. 몽고메리 카운티의 한 시민은 "9·11 테러범들은 특정한 목표에 돌진했지만 이번 사건은 범행 이유조차 분명치 않아 9·11 테러 때보다 더 무서움을 느낀다"고 말했다.
/워싱턴=김승일특파원 ksi8101@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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