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가 일본군 장교 '다카기 마사오'로 활약한 사실 등은 잘 알려져 있지만 그의 일제 하 행적에 대한 학문적 접근은 아직 미흡하다. 친일행각마저 '민족주의자의 고뇌'로 미화하는 논의가 있는가 하면 그 반대쪽 연구도 친일행위 자체를 부각하는 데 그치고 있다.역사문제연구소(소장 서중석 성균관대 교수)가 5일 개최한 '식민지 경험과 박정희 시대' 학술대회는 일제 하 경험이 박정희의 세계관 형성과 집권체제 구축에 미친 영향을 다각도로 논의했다. 특히 1930,40년대 박정희를 비롯한 조선인의 만주 체험과 그 유산에 대한 연구 성과가 여럿 발표돼 눈길을 모았다. 만주는 당시 조선인에게 '항일투쟁의 장'인 동시에 입신출세를 위한 '기회의 땅'으로 여겨진 곳으로, 최근 학계에서도 만주국 연구가 새로운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신주백 성균관대 BK21 연구교수는 '만주국군 내 조선인'이란 주제발표에서 "만주군 출신자들은 한결같이 입교 동기를 '독립을 위한 실력양성'으로 변명하지만 박정희 등 군관학교 조선인들의 민족감정이란 일제의 지배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인 가운데 일본인, 중국인을 체제 내 경쟁의 상대로 간주한 것에 불과하다"고 평가했다. 그는 "일례로 군관학교의 중국인 학생들은 항일 비밀조직을 결성하거나 중국 국민당 군대로 달아나기도 했지만 조선인 가운데는 비밀결사 조직도, 광복군 등에 투신한 경우도 없었다"면서 "이들은 광복 후 한국군 창군 과정에서도 핵심 역할을 했고 이후 한국사회의 중심으로 성장했다"고 지적했다.
임성모 연세대 강사는 "조선인의 만주 유입은 식민지 조선에서는 출세기회가 막힌 데 따른 것이지만 그곳에서도 고위 관료로의 진입은 쉽지 않았다"면서 1932년 결성된 국민동원조직 '협화회(協和會)'를 중심으로 재만 조선인의 위상과 활동을 짚었다. 그는 특히 만주국에서 의사(擬似) 국회 기능을 수행한 협화회 전국연합협의회(전련)의 대표로 활동한 친일인사 이선근(1905∼1983)을 통해 박정희 정권은 만주국의 여러 정책을 모방했다고 주장했다. 임씨는 이선근이 협화회의 강압적 동원방식에 반발하면서 오히려 "단순한 일제의 주구로 할 수 있는 '외과적' 협력이 아니라 한 차원 높은 '내과적' 협력을 했다"고 분석하고 "그의 사상은 광복 이후로 이어져 국민교육, 정신문화 등 각 영역에서 '결실'을 보게 됐다"고 말했다. 일례로 임씨는 농촌 새마을 운동은 만주국 생활개선운동과, 통일주체국민회의는 협화회 전련과 유사하다고 지적했다. 이선근은 이승만, 박정희 정권에서 문교부 장관, 대학 총장 등을 지냈다.
박진희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는 만주국 실업부 차장 등을 지낸 기시 노부스케를 비롯한 이른바 '만주벌' 인맥이 일본 내 친한파의 중추세력으로, 1965년 타결된 한·일 국교수립의 막후 협상을 주도하고 이후 왜곡된 한일경제협력에 개입한 과정을 집중 분석했다.
한편 오유석 성공회대 교수는 1970년대 농촌 새마을운동의 뿌리를 일제시대 경험에서 찾으면서 박정희 정권의 최고 업적 중 하나로 꼽혀온 이 운동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짚었다. 그는 "새마을운동은 체제위기를 미봉하려는 비상대책으로, 정신계몽을 중시하고 '새마을지도자' 같은 끄나풀을 활용했다는 점 등에서 일제 하 농촌진흥운동과 맥을 같이 한다"면서 "태생적 한계를 지닌 이 운동은 결국 노동력 강제동원으로 인한 영세소농의 이농과 농촌의 정부 의존성 심화에 따른 전통적 농촌공동체의 붕괴로 귀결되고 말았다"고 비판했다.
/이희정기자 jay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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