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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으로 현실읽기](18·끝) 한나 아렌트 "폭력의 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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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으로 현실읽기](18·끝) 한나 아렌트 "폭력의 세기"

입력
2002.10.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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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 테러 이후 일 년이 지났다. 아프간 공습에서 시작된 미국의 반(反) 테러 전쟁이 이라크로 확대되면서 세계는 또 다시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려들고 있다. 그러나 9·11 테러는 테러이기 이전에 잘못된 중동 정책이 불러온 부메랑 효과였다. 반 테러 전쟁은 시작부터 명분을 얻을 수 없는 광기였으며, 아프간 공습은 21세기가 여전히 폭력의 세기일 수밖에 없는 현실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혹자는 오늘날의 미국을 몰락기의 로마 제국에 비유하기도 한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미국은 언제나 자신들의 폭력을 '자유'와 '평화'라는 이름으로 은폐해 왔다. 남미에서, 베트남에서 그리고 한반도에서. 그러나 그것은 자유와 평화라는 미명 하에 자행된 폭력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의 평화 아래에서 얼마나 많은 비서구인들이 죽음을 당했는가를 생각해 보라.독일의 여성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1906∼1975·사진)는 1970년에 펴낸 '폭력의 세기'에서 20세기를 폭력의 세기로 명명했다. 물론 그 폭력의 정점은 아우슈비츠의 히틀러와 베트남에서의 미국이다. 특히 20세기에 일어난 수많은 폭력의 배후에는 항상 미국이 숨어 있었다. 동·서독의 통일과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으로 인해 생긴 냉전 체제의 일시적 해체는 마치 국제적인 평화의 분위기로 이어지는 듯했다. 그러나 아렌트가 정확하게 지적했듯이, 20세기의 평화란 전투기술의 발전의 소산일 뿐이며, 따라서 그것은 본질적으로 전쟁의 연속이다. 영화 '아마게돈'이 잘 보여주듯이 미국은 언제나 인류 평화의 수호자로 자임해 왔다. 그러나 그들이 주장하는 '평화'란 엄청난 규모의 폭력에 의해 유지되는 제국주의적 질서의 한 단면일 뿐이었다. 그래서 핵무기의 소유만이 제국주의적 폭력으로부터 평화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극단주의자들의 주장이 단순한 공상 이상의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왜 미국은 '인류 평화'의 수호자로 자임하는가? 그것은 '인류'와 '평화'라는 단어가 연상시키는 권력의 정당성을 획득하려는 욕망 때문이다. 아렌트에 의하면 권력과 폭력은 정반대의 논리 위에서 작동한다. 권력이 다수의 동의를 필요로 하는 반면, 폭력은 도구에 의존하기 때문에 다수가 없이도 가능하다. "권력의 극단적인 형태는 한 사람에 반하는 모든 사람이며, 폭력의 극단적인 형태는 모든 사람에 반하는 한 사람이다."

폭력은 본래 도구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폭력은 다른 모든 수단들처럼, 항상 그것이 추구하는 목적을 통하여 정당성을 획득하려 한다. 반면 권력은 결코 정당화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처음부터 다수의 지지와 동의에 의해 성립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권력이 폭력을 통해 정당성을 얻는 순간 그것은 권력이 아니라 폭력으로 돌변한다. 이것이 권력과 폭력의 아이러니컬한 관계이다. 총구로부터 가장 빠르고 완전한 복종을 얻어내는 폭력은 결코 권력과 동일할 수 없다. 폭력이 절대적으로 지배하는 곳에 권력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폭력의 대립물을 비폭력으로 사고하는 것이 올바르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폭력의 반대는 비폭력이 아니라 권력이다.

세계 대전과 냉전 체제를 통해 미국은 팍스 아메리카라는 제국주의적 꿈을 키워왔다. 그 결과 세계는 막강한 미국의 군사력 아래에 놓이게 되었으며, 미국은 자신이 세계 평화의 유일한 수호자라는 망상에 사로잡히기 시작했다. 그러나 폭력에 의해 유지되는 평화란 결국 또 다른 폭력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지금 미국 중심의 '평화'가 폭력으로 유지되는 모습을 목격하고 있다. 테러를 향해 돌을 던지기 전에 그것을 조장한 '불량국가' 미국의 폭력성을 단죄해야 한다. 아프간 공습과 이라크 침공은 결코 문명의 충돌도, 반 테러 전쟁도 아니다. 그것은 중동을 자신들의 지배 아래에 두려는 미국의 제국주의적 욕망일 뿐이다. '폭력의 세기'라는 아렌트의 주장은 21세기에 접어든 오늘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고봉준 수유연구실+연구공간 "너머" 연구원,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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