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10월8일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이 84세로 작고했다. 마르셀은 흔히 키에르케고르, 야스퍼스 등과 묶여 기독교적 실존주의자로 분류된다. 인간의 본질에 바탕을 둔 철학의 체계적 구축을 거부했다는 점에서 그는 실존주의자였고, 소설가 프랑수아 모리아크를 대부(代父)로 삼아 40세에 영세를 받았으므로 그는 기독교도였다. 그러나 마르셀 자신은 '기독교적 실존주의자'라는 규정을 거부했다. 영세를 받기 전부터 마르셀은 철학자 자크 마리탱을 비롯한 가톨릭 지식인들과 자주 어울렸지만, 끝내 '정통' 가톨릭교도가 되지는 못했다.야스퍼스나 마르셀을 기독교적 또는 유신론적 실존주의자라고 명명한 것은 자신을 무신론적 실존주의자로 내세웠던 사르트르다. 마르셀은 평생 사르트르를 좋아해본 적이 없었다. 당사자가 수상을 거부하기는 했지만 스웨덴 한림원이 사르트르에게 노벨문학상을 주기로 결정했을 때 마르셀은 이 결정을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마르셀은 또 사르트르가 내세운 '참여(또는 구속: engagement)'라는 개념이 당파적이라며, 이에 맞서 '유연(柔軟)'(또는 개방성: disponibilite)이라는 개념을 내세웠다. 그러나 윤리학과 존재론의 경계에 놓인 그 유연의 개념을 잣대로 마르셀은 제 나름의 '참여'를 수행했고, 그 참여는 더러 사르트르의 참여 못지않게 당파적이었다.
미국의 북베트남 폭격을 비판하는 지식인 대열에 마르셀이 합류했을 때 그 '유연'의 당파성은 두드러지지 않았다. 그러나 마르셀이 독일 점령기 부역(附逆) 지식인 숙청을 '위선적인 블랙리스트 철학'이라고 비판하거나 앙리 마시스 등의 우파 지식인들과 함께 '서방의 방어를 위한 지식인 선언'을 발표했을 때, 그가 사르트르를 당파적이라는 이유로 비판하는 것은 어색해 보였다.
고종석/편집위원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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