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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영원한 청년 이만섭(62)국민당 총재시절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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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영원한 청년 이만섭(62)국민당 총재시절 <16>

입력
2002.10.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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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9 선언이 나온 후 국민의 관심은 개헌 일정과 대선으로 옮겨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국은 모처럼 해빙기로 접어 들었다.그러나 갈 길이 먼 데도 불구하고 개헌 협상은 쉽사리 시작되지 않았다. 제1 야당인 통일민주당의 분열 양상이 주된 요인이었다. 김영삼(金泳三) 김대중(金大中)씨는 7월1일 민추협 상임위원회에서 단결을 강조했다. 김영삼씨는 "우리 두 사람은 갈라지지 않고 철저히 단결할 것"이라고, 김대중씨는 "80년과 같은 우매한 짓을 하지 않고 국민을 위해 어떠한 희생도 감수하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두 김씨 진영의 속내는 달랐다. 김대중씨는 7월8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1986년 11월의 대통령 불출마 선언을 백지화하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지난해 11월의 불출마 선언은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이 '자발적으로' 직선제를 하면 나가지 않겠다고 말한 것이지만 이번에는 어디까지나 국민이 쟁취한 것이다." 대선 출마를 강력히 시사한 것이다. 김대중씨는 또 "앞으로 전국을 돌면서 세상 여론을 들어 보겠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두 김씨 사이의 긴장은 고조될 수밖에 없었다.

두 김씨의 경쟁을 지켜보면서 나는 착잡한 심경이었다. 국민들이 원치 않는 방향으로 사태가 진행되는 게 걱정이었다. 나는 직선제 개헌의 조기 매듭이 최우선이라고 판단했다. 7월18일 기자간담회에서 나는 즉각적 개헌 협상을 촉구했다. "오늘의 민주화는 민정당의 결단도 아니고, 민주당의 노력에 의한 것도 아니다. 오로지 국민의 희생으로 얻어진 것이다. 그런데 이를 마치 전리품으로 여기는 두 김씨의 생각은 민주화를 저해하는 독선이라 아니할 수 없다. 지금 중요한 것은 개헌 협상을 빨리 시작하는 것이다."

국민의 눈을 의식해야만 했던 통일민주당은 결국 개헌 협상에 나섰다. 그러나 우리 국민당과 신민당은 협상에서 배제됐다. 민정당과 통일민주당은 7월 말 양 당 의원들로만 구성된 8인 정치회담을 갖는다고 발표했다. 양당의 횡포였다. 국민의 헌법을 만드는 정치협상이라면 원내 교섭단체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정당이 참여하는 게 당연했다.

국민당은 의원총회를 열고 즉각 경고했다. "우리는 민주주의의 정도에서 벗어 나는 것을 결코 용납할 수 없으며, 특정 정당의 당리당략이나 개인적 이해에 얽혀 국가대사가 결정되는 것을 좌시할 수 없다." 원내 교섭단체를 이룬 정당이 헌법 개정에 참여하지 못한다는 것은 공당으로서는 사활이 걸린 문제였다. 특히나 국민당은 일관되게 대통령 직선제를 주장해 왔다는 자부심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개인적으로 두 김씨에게 항의를 하거나 협조를 요청하지는 않았다. 헌법특위 구성을 맨 처음 제안했고, 영수회담 등을 통해 직선제 개헌을 이끌어 내는 데 나름대로의 역할을 한 사실은 국민이 평가하리라는 생각에서였다. 다행히 언론이 우리 편이 돼 주었다. 결국 민정당과 통일민주당은 8인 회담과는 별도로 신민당, 국민당과의 개별 정치협상도 병행하기로 했다.

개헌 협상은 순조롭게 진행됐고 한달 여 만에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이 마련됐다. 이렇게 빨리 개헌안이 합의된 것은 민정당이나 두 김씨가 모두 대통령 선거에 자신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9월2일 민정당 노태우(盧泰愚) 대표와 김영삼 총재가 만나 10월 개헌안 국민투표, 12월 대통령 선거 등에 합의했다. 보름쯤 뒤 9월18일에는 여야 만장일치로 국회에서 개헌안이 통과됐다. 이에 앞서 8월8일에는 김대중씨가 통일민주당에 입당, 상임고문으로 추대됐다.

개헌안과는 별도로 두 김씨측은 후보 단일화 협상에 착수했다. 9월7일 상도동은 김동영(金東英) 의원, 동교동은 이용희(李龍熙) 의원을 내세워 단일화 및 후보·총재 역할 분담 문제 등을 논의했다.

두 김씨는 그러나 후보 단일화 협상과는 무관하게 각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김대중씨는 곧바로 광주, 목포, 대전 등을 돌며 바람몰이에 나섰다. 김영삼씨측은 후보 조기 단일화를 거듭 강조하면서 동교동측에 지방 방문을 자제해 달라고 요청했다. 역사의 시계바늘은 다시 80년으로 되돌아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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