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모든 언론은 '만시지탄(晩時之歎)'이라고 썼다. 1987년 6월29일 민정당 노태우(盧泰愚) 대표는 국민 앞에 섰다. 그리고 직선제 개헌을 수용하겠다는 내용의 특별 선언을 발표했다. 민주화를 열망하는 국민에게 5공 정권이 내 놓은 항복 선언이었다. 모든 국민이 이를 환영했다. 거리에는 기쁨이 흘러 넘쳤다. 나는 즉각 환영 성명을 발표했다.6·29 선언의 전모는 아직 누구도 확실하게 말할 수 없다. 관련자들의 증언이 조금씩 차이가 난다. 저마다 자신의 위치에서 바라보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내가 보기에 적어도 전두환(全斗煥) 대통령과 노 대표는 6·29 선언을 놓고 충분한 사전협의를 했다. 앞서 밝혔듯 6월24일 나와의 영수회담에서 전 대통령은 내게 노 대표를 만나 한번 더 설득해 주기를 부탁하기까지 했다. 때문에 나는 그날 오후 서울 시내의 호텔에서 노 대표를 다시 만나 인간적 의리로 고민하는 전 대통령의 심경을 전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직선제를 하는 것이 나라와 노 대표 모두를 위한 길이오." 나의 말에 노 대표 자신도 "나도 직선제를 건의해서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정계를 은퇴할 생각"이라고 비장하게 말했다.
후일 내가 듣기로는 노 대표나 전 대통령이 나의 설득에 어느 정도 영향을 받은 것만은 분명하다. 내가 6·29 선언을 이끌어 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두 사람이 최종 결심을 하기 전에 그것이 바람직한 선택임을 확신하는 데 나의 조언이 긍정적 역할을 했으리란 얘기다.
나와 전 대통령의 영수회담에 배석했던 김성익(金聲翊) 청와대 통치사료비서관은 저서 '전두환 육성 증언'에 두 사람의 대화를 자세히 기록한 뒤 당시의 분위기를 이렇게 적었다.
"전 대통령과 이 총재와의 회담에서는 두 사람 사이에 인간적 신뢰 관계를 바탕으로 깊은 얘기가 오갔다. 직선제 수용 결단을 권하는 이 총재의 자세는 요구가 아니라 설득이었다. 이 총재는 전 대통령과 같은 입장에서 정곡을 찌르는 논리와 어법을 구사하면서 조목조목 이해득실을 따져서 얘기했다. 전 대통령은 이 총재가 얘기하는 동안 대단히 진지하고 진중한 표정으로 경청하는 모습이었다. 대통령의 반응은 그의 대답에서도 나타나지만 직선제를 받아 들이는 문제에 있어서 이 총재의 얘기에 완전히 공감한다는 방향이었다. 눈 여겨볼 대목은 전 대통령이 이 총재에게 노 대표를 비공식적으로 만나 얘기를 해 달라, 직선제를 하더라도 민정당과 국회에서 하는 게 좋다고 한 부분이다. 전 대통령은 직선제를 받아 들일 용의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결단이 아니라 민정당의 결단으로 해야 된다는 내용이다."
나의 중학교 동창이자 노 대표의 동서인 금진호(琴震鎬) 전 의원도 "내가 6·29 구상을 할 때 가장 도움을 준 사람은 국민당 이만섭 총재"라는 노 대표의 얘기를 전했다. 전 대통령도 후일 백담사로 찾아간 조계종 서의현(徐義玄) 총무원장에게 비슷한 얘기를 했다고 들었다. 뿐만 아니라 6월24일 영수회담이 끝난 뒤 이종율(李鍾律) 청와대 대변인이 우리 당 최용안(崔容安) 대변인에게 "전 대통령이 이 총재의 말에 감명을 받았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나와 만난 날(6월24일) 저녁 전 대통령은 노 대표를 불렀다. 99년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노 전대통령이 밝힌 바에 따르면 전 대통령은 노 대표에게 "직선제를 해도 이기지 않겠소"라고 강하게 직선제를 권유했고, 노 대표는 "과연 그렇겠습니까"라고 반문했다. 노 전대통령은 "전 대통령의 말을 '앞으로 절대 변하지 않는 결심'으로 굳혀야겠다는 마음에서 반어법을 쓴 것"이라고 술회했다. 노 전 대통령은 이 인터뷰에서 "당시 국민당 이만섭 총재를 두 번이나 만났으며, 이 총재가 대통령 직선제를 강력히 권유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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