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폭력으로 고3 외아들을 잃은 일은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슬픔을 잊기 위해 히말라야를 수없이 오르게 되었다. 하늘 가까이 가면, 온통 하얀 만년설 속에서 혹시 아들을 만날 수 있을까 하는 기대로 발이 아픈지 모르고 한없이 오르곤 했다.그 해 히말라야의 척박한 산기슭에도 사람들은 살고 있었다. 한국전쟁 후 먹지 못해 여위어가던 처참한 모습의 우리들처럼, 그곳에도 굶어 쓰러졌거나 구걸하는 아이들을 쉽게 만날 수 있었다. 그 중 한 아이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간신히 눈만 껌벅이며 힘없이 누워 있는 아이는 놀랍게도 아들 녀석의 눈매를 쏙 빼닮아 있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나는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배낭에서 음식을 꺼냈다. 그런데 아이는 고개를 휙 돌리며 나를 외면했다. 아이의 온몸은 열로 펄펄 끓고 있었고 얼굴 위로는 파리들이 들끓었다. 그대로 두면 곧 죽을 것만 같았다.
아이를 등에 업고 4시간을 걸어 내려와 시내 대학병원에 입원시켰다. 그리고 그 길을 다시 되짚어 깜깜한 자정이 돼서야 히말라야의 첫 숙소에 도착했다.
그 밤 내내 나는 좁은 텐트 속에서 몸을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왜 아이는 음식을 건네는 나를 외면했을까. 그 모습이 눈에 계속 아른거렸다.
병원에서 만난 한국인 선교사에게 아이를 잘 돌봐 달라고 신신당부하지 못한 점이 마음에 걸렸다. 동이 트자마자 어제 하루 종일 올랐던 길을 다시 내려갔다. 그러나 병원에 도착했을 때 아이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내 아들을 잃었을 때 만큼이나 큰 죄책감에 가슴이 무너졌다.
다시 8시간 동안 한걸음 한걸음 히말라야를 오르며 아이의 마음을 헤아려 보았다. 죽어가던 아이가 얼굴을 휙 돌리던 모습은 분명 산자에 대한 증오심의 발로였으리라. 죽음 앞에서 아이는 철저히 혼자여야 했던 것이다. 이 시간에도 그 아이처럼 질병과 기아, 전쟁과 기근으로 가엾게 죽어가는 어린이들이 얼마나 많을까.
나는 다짐했다. 내 아들에게 못 다한 사랑을 고통 속에 신음하는 이 세상의 수많은 어린이들을 돕는 일에 다 쏟으리라고. 그 소중한 생명들이 죽음 앞에 함부로 방치되지 않도록 내 힘을 다하리라고. 유엔 경제사회이사회 협력기구인 플랜(양친회)한국위원회에서 3,800명의 후원자와 함께 봉사하게 된 것도 바로 그 잊을 수 없는 일 때문이었다.
/고 인 경 플랜한국위원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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