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타살 의혹이 강하게 제기됐던 노동자 신호수(당시 23세)씨. 의문사라는 정황이 충분했지만, 당시 사건을 맡았던 경찰은 사인이 밝혀지기도 전에 부검 없이 사체를 매장했다. 유족들의 거센 항의가 있자 20일 후 묘를 파헤쳐 유족의 입회를 막은 채 부검을 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후로부터 10여년이 지난 요즘 상황은 어떨까. 사망원인 불명이나 사체 이상징후 등으로 부검이 필요한 죽음 중 6%가량만 실제 부검이 이뤄진다는 보고서가 나와 '부실 부검'이 의문사를 양산한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의혹의 죽음 대부분 부검 안해
4일 대구 '개구리소년' 유골 감식단장을 맡고 있는 경북대 의대 곽정식(郭精植·대한법의학회 회장) 교수 등 6명의 법의학자들이 최근 의문사진상규명위에 제출한 '사인확인제도 개선방안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2000년 법의학적 검증이 필요한 죽음 6만3,015건 가운데 실제 부검이 이루어진 경우는 6.3%인 4,000여건에 불과했다. 이는 미국의 55%, 일본 30%에 비해 크게 낮은 비율. 증상을 특정할 수 없거나 검사결과 '이상소견'이 나온 죽음 3만1,000여건과 외부원인에 의한 사망 2만8,000여건, 원인 미상 2,400여건 등 의혹이 있는 죽음 대다수가 법의학 분석이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곽 교수 등은 이처럼 부검률이 낮은 것은 정확한 사인 확인 절차 없이 사망신고 접수, 매장, 화장을 사실상 허용하고 있는 법규정(호적법 및 장사 등에 관한 법률)의 허술함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특히 사인이 불분명 하거나 억울한 죽음의 상황이 드러난 경우에도 부검을 강제하는 규정이 없어 사망의 진실은 허공에 날아가 버리는 경우가 허다한 실정이다.
■영, 미 등 죽음 원인 꼼꼼히 따져
그러나 억울한 죽음에 대한 영국, 미국, 일본 등 선진국의 태도는 우리와 다르다. 우선 정확한 사인이 밝혀지지 않았을 때는 사망등록 자체를 받지 않는다. 또 입양아의 죽음이나 의사진료가 없었던 사망 등 죽음의 종류를 10∼20여개로 분류해 반드시 전문 법의학 심판관의 지휘를 받도록 하고 있다.
연구진은 보고서에서 우리도 사체 처리와 관련된 법률을 선진국 수준으로 개정하고 의문사 발생 소지가 있는 죽음의 종류를 의료법에 적시, 모두 변사처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이한영(李韓榮) 법의학 과장은 "전국의 사망사건을 소화하기에는 국과수의 인원이 턱없이 부족할 뿐 아니라, 전문성이 떨어지는 일반의사를 통한 사체검안으로 초동수사부터 오류를 범하는 경우도 있다"며 "수사기관으로부터 독립해 사체에 대한 모든 것을 책임지는 '검시청' 설립을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진희기자 rive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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