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佛像은 그 시대 미남얼굴 닮아"/"한국불상의 원류를 찾아서"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최 완 수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佛像은 그 시대 미남얼굴 닮아"/"한국불상의 원류를 찾아서"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최 완 수

입력
2002.10.05 00:00
0 0

우리 문화사에서 불교의 비중은 매우 크다. 372년 고구려 소수림왕 2년에 전래된 뒤 우리 민족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해왔으며 이 때문에 우리 국토 어디든 유적을 쉽게 볼 수 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흔한 것이 바로 불상이다.최완수(崔完秀·60) 간송미술관 연구실장이 불상의 유래와, 거기에 담긴 사회 문화상을 탐구한 '한국불상의 원류를 찾아서'(대원사 발행)를 냈다. EBS 강의와 잡지 기고문을 중심으로 다시 썼는데 인도 불교 미술의 발생에서 시작해 중국 불교 미술과 우리나라 삼국시대의 불상을 다루고 있다. 저자는 3권을 더 내 고려말까지 우리나라 불상과 불교 미술을 체계적으로 다룰 예정이다.

최완수 실장은 "불상에서 한 시대를 읽을 수 있다"며 불상 연구의 의미를 강조한다. 대표적 보기가 서산마애삼존불이다. 이목구비가 시원한데다 명랑 쾌활한 얼굴을 하고 있어 넉넉한 인품을 느낄 수 있다고. 저자는 "불상이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6세기말 또는 7세기초의 백제는 해상 교역을 장악해 경제적으로 부유했는데 그런 여유가 불상에 반영돼 있다"고 말한다.

불상이 처음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다. 기원전 544년 석가모니가 열반한 뒤 약 600년 동안 석가모니의 모습은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석가모니의 전기를 소재로 한 그림(불전도·佛傳圖)에도 성스러운 나무나 석가모니의 발자국 등을 통해 상징적으로 표현돼 있을 뿐이다. 저자는 "성인으로 추앙받는 인물을 표현하면 불경스럽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불상은 언제부터, 왜 제작됐을까. 저자는 1세기께 인도 서북 간다라지방 쿠샨제국과 중부 마투라지역에서 불상이 나타나기 시작한다고 말한다. 개인보다는 중생의 해탈을 목표로 하는 대승불교가 나타났고 중생이 구원을 갈구할 대상으로 불상 제작이 시작됐다고. 특히 쿠샨제국은 세계 무역의 중심국으로 개방적이고 진보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에 앞서 기원전 334∼325년 있었던 알렉산더대왕의 동방 원정은, 신을 사람 모습으로 조형화한 그리스 문화를 전파했다.

그 뒤 인도인인 가섭마등(迦攝摩騰)과 축법란(竺法蘭)이 불경과 석가불입상을 중국에 전했고 우리나라에는 소수림왕 2년 전진(前秦)의 황제 부견(符堅)이 전도승 순도(順道)와 불상 및 불경을 보내 불교가 공식적으로 들어왔다. 백제에는 침류왕 원년(384년) 동진(東晋)에서 마라난타(摩羅難陀)가 불교를 전했으며 신라는 이차돈(異次頓)의 순교로 불교가 공인받았다. 불교가 전래될 당시의 불상이 전통적인 간다라불상(구형·舊型)의 모습이었는지 중국형으로 바뀐 불상(신형·新型)이었는지는 짐작하기 어렵다. 하지만 서울 뚝섬에서 발견된 선정불좌상이 구형에 가깝다는 점에서 저자는 중국서 전해진 불상을 구형으로 추측한다.

구형이든, 신형이든 불상은 나라마다 시대마다 모습이 다르다. 인도 파키스탄 등의 구형 불상은 눈이 둥글고 곱슬머리지만, 중국과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진 신형은 눈두덩이가 두툼하고 머리가 곧게 뻗어있다. 그 지역 사람의 생김새를 반영한 것이다. 특히 고대 인도인은 위대한 지도자는 관상도 다르며 가령 32대인상(大人相)을 타고난 사람은 황제가 되거나 부처가 된다고 믿었다. 이 때문에 불상의 얼굴은 그 시대에 가장 잘 생기고 권력 높은 사람의 모습을 표현했다.

저자 역시 열살 때 잘생긴 불상의 얼굴에서 충격을 받았다. "고향인 충남 예산의 보덕사에 갔었어요. 극락전의 아미타여래좌상의 황금빛 나는 인물상이 어찌나 잘생겼던지…." 하지만 그는 사발 하나를 엎어 놓은 것 같고 표면에 작은 고둥 껍질 같은 것을 붙여놓은 아미타여래좌상의 머리를 보고 의문을 품는다. "얼굴은 잘 생겼는데 왜 머리를 이상하게 했을까." 스님에게 물어도 시원한 대답이 없었다. 저자는 "이미 그때부터 내가 불상을 연구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이 책은 많은 부분이 인도와 중국의 불상에 대한 것이다.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은 불상보다는 당시의 역사와 불교가 수용되는 과정에 많은 지면을 할애했다. 따라서 2, 3, 4권이 나와야 우리나라 불상의 모습을 집중적으로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저자는 1965년 서울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국립박물관에서 일하다 이듬해 사립 박물관인 간송미술관의 연구실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대학교수는 한번도 된 적이 없지만 한국불교미술사학계에 '간송학파'라는 학맥을 이룰 정도로 영향력이 막강하다. 이 책은 회갑(3일)을 기념해 냈다.

/글=박광희기자 khpark@hk.co.kr

사진=박서강기자

● 최실장이 말하는 백제불상

'한국불상의 원류를 찾아서' 1권에는 통일신라 이후의 불상은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서산마애삼존불과 태안마애삼존불 등 백제 불상의 가치를 높이 평가한다.

▶서산마애삼존불(위)

최완수 실장은 기자에게 "혹시 이 불상 얼굴이 박찬호 선수와 닮아 보이지 않느냐"고 물었다. 눈이 부리부리하고 얼굴이 넓적하며 입술이 두툼하고 콧방울이 커 둘의 생김새가 비슷하다는 것이다. 최완수 실장은 서산을 중심으로 한 내포 땅에서는 삼존불이나 박찬호 같은 생김새가 잘 생긴 얼굴로 여겨졌다고 말한다. 이 삼존불은 정말 반가워 미소짓는 애정 어린 얼굴 표정이 일품이며 주민들은 옛날부터 이 불상이 내포 일대의 병화(兵禍)를 막아준다고 믿었다. 충남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 산 기슭에 있다. 국보84호.

▶ 태안마애삼존불(아래)

충남 태안군 태안읍 동문리 백화산에 있다. 보물 432호. 보주(寶珠·보배로운 구슬)를 손에 든 작은 보살상을 가운데 두고 양 옆은 우람한 불상이다. 백제 위덕왕이, 부왕인 성왕이 고구려에 뻬앗긴 땅을 되찾으려다 실패하고 숨지자 그 원혼을 달래고 백성들의 울분을 수습, 국가 재건의 구심점으로 삼기 위해 성왕이 고토 회복의 전진기지로 삼은 백화산에 삼존불을 세운 것으로 최완수 실장은 추정한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