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국은 어느 때보다도 긴박하게 돌아갔다. 재야 운동권 및 통일민주당은 1987년 6월26일 국민평화 대행진을 개최키로 하는 등 힘으로 직선제 개헌을 따내겠다는 의지를 다졌다. 여당 내에서도 민의를 존중해 대통령 직선제를 받아 들이자는 의견이 조금씩 흘러 나왔다.6월22일 여당은 여야 영수회담 개최 방침을 발표했다. 날짜는 이틀 뒤인 24일로 잡혔다.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은 오전 10시에 통일민주당 김영삼(金泳三) 총재, 정오에 신민당 이민우(李敏雨) 총재를 각각 만난 뒤 오후 2시40분에 나와 만났다.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저는 대통령 할 욕심을 가진 사람이 아니어서 진심으로 하는 이야기이니 믿고 들어 주십시오." 그리고는 말을 이었다. "오늘의 이 난국에서 택할 길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떳떳하게 대통령 직선제를 하는 것입니다. 강경파 주장처럼 비상조치를 선포하거나 하는 일은 안됩니다." "비상조치는 절대 선포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남은 길은 대통령 직선제 밖에 없지 않습니까."
전 대통령의 얼굴에는 고민이 떠올랐다. 나는 앞서 열린 김영삼 총재나 이민우 총재와의 회담 내용이 궁금해서 대화 내용을 물었다. "김 총재는 우선 선택적 국민투표를 해야 한다는 말을 합디다. 이 총재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나는 자신을 갖고 내 의견을 말했다. "선택적 국민투표도 좋지만 그 경우 어떤 무리수를 써도 직선제 찬성이 90%가 넘을 게 분명합니다. 그럼 민정당은 대통령후보조차 낼 수 없게 됩니다. 선택적 국민투표로 국력을 낭비할 것 없이 바로 대통령 직선제를 받아 들이는 게 좋겠습니다." 전 대통령은 한 발 물러섰다. "직선제를 하더라도 민정당과 국회에서 하는 것입니다. 민정당도 귀가 있고 민의를 수렴하고 있을 테니 그 결과를 받아 들이라고 하십시오."
나는 이 자리에서 인간적인 설득도 병행했다. "저는 대구 촌놈으로 국회의원을 다섯 번이나 했습니다. 한 당의 총재까지 하고 있으니 나라 잘 되는 것 외에 더 바랄 게 없습니다. 대통령께서도 여한이 없으시리라고 봅니다. 주저할 게 뭐 있습니까."
전 대통령은 잔뜻 심각한 표정을 지은 채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더니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 얘기를 노태우(盧泰愚) 대표에게도 한 적이 있습니까" "물론 얘기했습니다. 대통령께서 결심만 하시면 노 대표를 다시 만나 마음을 굳히도록 하겠습니다." "비공식적으로 만나 한번 더 얘기해 보세요."
나는 이날 회담에서 전 대통령이 직선제 개헌을 받아 들일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음을 눈치챌 수 있었다. 다만 의리를 앞세우는 그가 자신은 선거인단에 의한 간접선거로 쉽게 대통령이 되고서 노 대표에게 위험천만한 도박인 직선제 대통령 선거를 권하기가 인간적으로 미안해서 망설이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한편 김영삼 총재는 회담 후 "4·13 조치 철회 요구가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며 회담 결렬을 선언했다. 이에 민정당은 "모든 것을 노 대표에게 맡겼으니 국회에서 개헌 논의를 하면 되지 않겠느냐는 대통령의 말은 4·13 조치를 철회하겠다는 뜻"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통일민주당은 "그런 중대 사안은 영수회담에서 명시적으로 밝혀야 했다"며 결렬 선언을 밀고 나갔다.
그날 밤 김대중(金大中) 민추협 공동의장이 자택 연금에서 풀려 났다. 김 의장은 "6·10 국민대회에 큰 감격을 느낀다"며 "전두환 정권이 아직도 사태를 심각하게 인식하거나 민주화할 생각이 있다고 볼 수 없다"고 말했다. 다음날 김영삼 총재와 김대중 의장은 동교동 김 의장 자택에서 만나 전두환 대통령의 개헌 논의 재개 의사를 4·13 조치의 철회로 받아 들일 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6월26일 예정대로 국민평화 대행진이 전국 주요 도시에서 동시에 열렸다. 국민운동본부가 집계한 대회 참석자는 무려 130만명이었다. 6·10 대회 때보다 개최 도시나 시위 발생 지역, 참가 인원이 훨씬 많았다. 5공 정권이 들어선 이후 최대 규모였다. 대회에서는 이제 호헌 철폐 대신 '민주쟁취, 독재타도'라는 구호가 흘러 넘쳤다. 5공 정권도 이제 더 이상 버티기 힘든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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