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5일 국감에서 4,000억원 대북 지원설을 시사한 뒤 잠적했던 엄낙용 전 산업은행 총재가 4일 대북 비밀지원 가능성을 또다시 강하게 제기했다. 엄 전 총재는 이날 "대출 당시 산은 총재였던 이근영 금감위원장도 '상부의 강력한 지시가 있어서 어쩔 수 없었다'고 말했다"고 증언, 정부 고위층의 압력에 의한 대북 지원용 대출의혹 가능성에 힘을 실었다. 그러나 이 같은 대북 지원설이 주로 증언에 근거, 물증이 떨어지는 만큼 계좌추적을 통한 의혹 규명이 불가피하게 됐다.■대북지원 가능성 제기
엄 전 총재는 이날 4,000억원 대북지원 여부에 대해 긍정도 부정도 명확히 하지 않았지만, "서해교전을 보면서 우리가 지원한 자금으로 우리 장병들이 공격당하는 사례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고 말해 대북 지원설을 사실상 인정했다. 그는 특히 대출 지시를 내린 당사자로 한광옥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의 실명까지 거론하는 등 대북 지원설을 기정사실화했다. 이는 김충식 전 현대상선 사장의 "우리는 손도 못댔다. 정부가 갚아라"는 발언과도 궤를 같이하고 있다. 특히 한나라당은 이날 2000년 3월 현대상선이 싱가포르 도쿄 등 해외에서 외화자금 3,000만달러를 인출, 남북정상회담 성사금으로 사용한 흔적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같은 새로운 사실에 불구하고 대북지원설을 확인할 결정적 증거는 여전히 확인되지 않았다. 이근영 금감위원장은 이날 "엄 전 총재에게 상부지시 운운한 적이 없다"며 "또 엄 전 총재가 대북사업이 민간차원에서 하는 게 아닌 만큼 경협자금에서 지원해달라는 김 전 사장의 말을 오해한 것 같다"고 해명했다.
■밝혀야 할 의혹
우선 대북 비밀지원 여부가 밝혀져야 할 1차적 과제이지만, 만일 이 주장이 사실일 경우 4,00억원이 어떤 용도로 북한에 지원됐느냐도 규명돼야 할 대목.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해 정부가 뒷돈으로 제공한 '뇌물성'인지, 금강산사업 독점권을 따낸 현대가 북한에 관광료외에 추가로 지급하기로 한 '플러스 알파'인지 밝혀져야 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4,000억원이 대북 송금이 아니라 당시 금강산관광사업에 따른 손실로 유동성위기를 겪고 있던 현대아산에 손실보전 및 대북 사업자금으로 사용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당시 현대아산은 금강산사업에 따른 누적손실로 자본잠식 상태였고, 그 결과 2001년 1월 북한에 약정금액의 절반(600만달러)만 보냈으며, 2,3월분은 아예 체납해야 했다. 현대아산은 4,000억원 대출직전인 6월초 통일부에 남북경제협력(경협자금)을 대출해 줄 것을 공식 요청했지만, 불가 판정을 받았다. 이에 따라 금강산사업이 국가적 중대사업이었던 정부가 현대아산의 손실보전과 대북 사업비조로 경협자금을 대신해 산은을 통해 지원했을 가능성도 있다는 것.
이에 따라 이제 의혹을 밝혀내기 위해서는 당국이 계좌 추적에 나서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다. 금융감독원은 이에 대해 "금융 당국이 계좌 추적을 하기 위해서는 금융기관이 법을 위반했을 경우에만 가능한 것"이라며 "분식회계 등을 통한 자산 이득이 없는 상황에서 거래 기업에 대해 계좌 추적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금융계와 법조계 전문가들은 "금융 당국의 의지만 있다면 현행 법 테두리 내에서도 얼마든지 계좌 추적이 가능하다"고 지적한다. 금융계 고위 관계자는 "금융실명제법에 장부 외 거래 등에 대해서는 계좌추적을 할 수 있도록 예외 규정을 만들어놓고 있는 만큼 충분히 이번 사건에 적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유병률기자 bryu@hk.co.kr
이영태기자 ytle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