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월, 상달입니다. 하늘이 높아져 상달인지 상달이어서 하늘이 높아졌는지 알 수 없습니다만 그 세월에 그 하늘을 이어 '상달'이라 일컬은 아득한 지혜가 참 그윽합니다. 엊그제도 강의를 하면서 창 너머로 문득 파랗고 깊은 하늘이 눈부시게 높은데 갑자기 왜 이렇게 침침한 교실에 앉아 있어야 하는지 불쑥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을 받았습니다. 참 좋은 계절입니다.어제는 개천절이었습니다. 개천절이 국가 경축일로 정해진 사연을 늘어놓을 필요는 없을 듯 합니다. 누구나 이미 알 듯 나라의 처음을 드러내는 '상징적인 날'이니까요. 국경일에 관한 우리네 관심은 대체로 그러합니다. 감격스러운 정서도, 윤리적인 긴장도, 다져지는 국민의식도 별로 두드러지지 않습니다.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하는 규범적인 발언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도 무척 상투적일 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국민들이 국경일을 무시하거나 간과하는 것은 아닙니다. '내일은 개천절이라 쉬는 날이야. 우리 어디 놀러 갈까?'하는 것이 국경일을 맞는 우리네 일상입니다. 이러한 태도를 못마땅한 것으로 여길 분들도 없지 않을 듯 합니다. 하지만 그래서 이 날을 경건하고 엄숙하게 보내라고 강제하려 든다면 그거야말로 위험한 일입니다. '개천절이라 쉬는 날이래!'하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그 날이 다른 날과 '다르다'는 것을 이미 몸으로 겪고 있습니다. 현학적으로 말한다면 그 날에 대한 '의미론적 표적 짓기(semantic marking)'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개천절을 맞으면 거의 두근거린다고 해도 좋을 감동이 이는 것을 경험합니다. 국경일이어서가 아니라 '개천(開天)'이라는 용어 때문입니다. 그 용어의 역사적 연원이나 그것이 그렇게 발언된 맥락보다 그저 그 말이 담고 있는 소박한 뜻, 곧 '하늘을 연다'고도 할 수 있고, '열린 하늘'이라고 할 수 있을 그 문자적 의미가 주는 시적(詩的) 감동이라고 해도 좋을 듯 합니다.
아득한 때부터 우리는 하늘을 예사롭게 경험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네 하늘경험은 삶의 근원이고, 삶의 규범이고, 삶의 완성이었습니다. 모든 처음은 하늘로부터 비롯했습니다. 당연히 의미는 그곳으로부터 분출하고 그 곳으로 귀착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하늘 열림은 우주의 출현, 존재의 현존을 의미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늘을 열어 그렇게 열려진 하늘을 이고 사는 것이 사람다운 삶의 모습이었습니다. 마침내 삶에 대한 감사와 감격이 솟는 환희를 아득한 우리 어른들은 '하늘을 춤 추는' 몸짓으로 드러냈습니다. 무천(舞天), 그렇게 사람들은 우리네 축제를 일컬었습니다.
그래서 그러리라 여겨집니다만 우리 나라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가 윤동주의 '서시'라는 사실이 또한 범연하지 않습니다. 그 시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하고 시작합니다. 실상 그 뒤의 구절들은 쉽게 읽혀지는 내용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이 시를 좋아하는 것은 아무래도 그 첫 연이 품고 있는 거의 무조건적인 공감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하늘은 우리에게 그저 하늘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삶의 '모두'입니다.
그런데 두렵습니다. 어쩐지 하늘이 점점 닫혀지고 있는 듯 합니다. 공해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때문인 것만은 아닌 듯 합니다. 하늘을 우러러 열린 하늘을 숨쉬고, 그 아래서 덩더쿵 땅을 구르며 그 열린 하늘을 휘감는 춤사위가 점점 사라지는 듯 합니다. 정직하지도 떳떳하지도 않은 몸짓이 온 땅에 가득합니다. 하늘을 배반하는 흉흉한 그림자가 땅거미처럼 하늘을 덮는 듯 합니다.
하늘을 닫는 일, 제발 하늘 열린 상달에서만이라도 이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정진홍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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