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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영원한 청년 이만섭(59)국민당 총재시절 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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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영원한 청년 이만섭(59)국민당 총재시절 ⑬

입력
2002.10.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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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동 용퇴', '4당 대표회담 개최' 등을 촉구한 6월13일의 나의 기자회견이 태풍 정국을 가라앉힐 수는 없었다. 학생들은 명동성당 농성을 15일에 풀었지만 시위는 오히려 전국으로 확산됐다. 명동성당의 농성이 해제되던 날 전국 59개 대학에서 격렬한 교내·외 시위가 있었다. 16일에는 시위대가 언론의 불공정 보도 개선을 요구하며 KBS 부산 총국을 습격하기도 했다.18일에는 6·18 최루탄 추방대회가 열렸다. 국민의 민주화 열기는 다시 한번 폭발했다. 경찰이 10만여명을 투입, 원천 봉쇄에 나섰지만 전국 16개 도시에서 150만여명이 대회에 참가했다. 부산에서는 30만여명의 시위대가 서면에서 부산역에 이르는 도로를 완전히 점거했다. 시위대는 수백대의 차량을 앞세워 다음날 새벽까지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쳤다. 부산 치안당국은 "경찰력으로는 시위를 막을 수가 없다"는 보고를 올렸다. 공권력이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민심은 흉흉해 졌다. 위수령이니 계엄령이니 하는 말들이 나돌았다. 서울 인근 지역의 공수 부대가 이동하는 게 목격됐느니 하는 뜬소문까지 있었다. 국민은 '제2의 광주'와 같은 불행한 사태가 일어나지 않을까 걱정했다. 집권세력을 지지하던 미국의 태도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백악관은 "한국 정부는 야당과 개헌 논의를 해야 하며 평화적 방법으로 소요를 종식시켜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위기감을 느끼기는 5공 정권도 마찬가지였다. 여권 내부에서도 의견이 갈렸다. 마침내 노태우(盧泰愚) 대표가 내가 제안한 4당 대표회담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각 당 대표에게 개별 회담을 제의했다. 나와 신민당 이민우(李敏雨) 총재는 20일로 날짜가 잡혔다. 그러나 통일민주당 김영삼(金泳三) 총재는 전두환(全斗煥) 대통령과의 회담이 아니면 의미가 없다며 노 대표의 제의를 거부했다.

20일 아침 회담장인 국회 귀빈식당에 도착하자, 잠시 후 노 대표가 들어 왔다. 사진기자들이 포즈를 부탁하자 노 대표는 "나는 오늘 이 총재로부터 좋은 이야기를 많이 들어야 하니 이 총재 사진을 많이 찍으라"고 했다. 나는 노 대표의 말이 농담인 줄은 알았지만 이날만큼은 사진 찍기가 부끄러웠다. 뭘 잘했다고 국민들 앞에 얼굴을 내민다는 말인가.

나는 노 대표에게 직설적으로 말했다. "이순신 장군은 필사즉생(必死卽生) 필생즉사(必生卽死)라고 말했습니다. 옳은 것을 위해 목숨을 바치면 삶을 얻고, 소아에 매달려 살려고 하면 죽는다는 말이지요." 노 대표는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받았다. "나도 자리에 연연하지 않겠습니다. 내가 발 벗고 수습에 나서겠습니다."

왠지 회담이 잘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이어 나는 시국 수습안을 제시했다. 첫째 4·13 호헌 조치 즉각 철회, 둘째 개헌 논의 즉각 재개, 셋째 6·10 사태 관련자 즉각 석방, 넷째 김대중씨 자택 연금 해제, 다섯째 인권·언론자유 보장 등 민주화 조치 단행 등이었다. 9일 뒤에 나온 6·29 선언과 맥을 같이 하는 내용이었다.

나의 제안에 노 대표는 기대 이상의 반응을 보였다. "잘 알았습니다. 긍정적으로 수용하는 방안을 세우지요. 각계 각층의 여론과 민심을 수렴하고 있으니 내일 의원총회를 통해 종합한 뒤 내주 초쯤 민정당의 시국 수습 방안을 밝힐 것입니다."

그날 이후로 여권 내부의 변화 조짐을 잇달아 감지할 수 있었다. 이틀 뒤인 22일 노 대표로부터 다시 점심을 함께 하자는 제의가 왔다. 나는 이 자리에서 거듭 노 대표를 설득했다. "이 난국을 수습하기 위해서는 묶여 있는 김대중(金大中)씨를 풀고, 민주화 조치도 취해서 정정당당하게 직선제로 승부를 거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당신도 살고 나라도 사는 길입니다."

노 대표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내가 아무리 직선제를 한다고 해도 대통령이 결심하지 않으면 안 될 텐데요." 나는 얼른 말을 받았다. "대통령은 내가 만나서 어떻게든 설득해 볼 테니 먼저 노 대표부터 결심을 하시지요."

6월 정국은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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