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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29)소설가 강석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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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29)소설가 강석경

입력
2002.10.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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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작가들이 성장기부터 작가를 꿈꾸었다고 하지만 내가 문학의 길로 들어선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대학신문에 난 추계 문예 현상공고를 보고 응모했고 당선이 되었다. 졸업반 때였다. 아버지의 파산으로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상금 때문에 소설이라는 것을 처음 써본 것인데 심사했던 이어령 선생님이 나를 불러 격려했다. 선생님은 당신이 맡고 있던 '문학사상'에 등단하라면서 단편 2편을 써오라고 했다. 기대치 않았던 추천이었지만 나는 교수 연구실을 빌려 밤늦도록 소설이라는 것에 매달렸다. 혼자 글을 쓸 나만의 방이 없었고 이런 악조건이 나를 문학으로 떠밀었는지 두 편의 단편이 통과되었다. 이리하여 대학을 졸업한 해에 나는 내 인생의 설계도에 없었던 작가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원래는 미대 대학원에 진학하여 조각과 함께 미술 평론을 공부할 생각이었다.무의식 중에 썼지만 등단 단편들을 보면 무엇이 나를 문학으로 이끌었는지 알게 된다. 세 편 다 조직 사회에서 자기를 잃은 인물의 자아찾기가 주제였다. 아동잡지사에 근무하다 잡지가 폐간되는 바람에 세 달만에 첫 직장을 잃게 된 당시의 경험이 조직사회 속의 개인에 대해 생각하도록 했고 사회의식을 싹트게 했다.

20대의 마지막에 직장을 그만 두고 전업작가 생활로 들어섰다. 삼 년간 직장 생활을 했으나 나는 늘 물 위에 뜬 기름 같았다. 마음이 공허했고 어떤 영혼의 갈망에 흔들렸다. 언어는 늘 머리 속에 있었기에 원고지 위에서 그것을 모색해야 했다. 영혼의 눈은 어느덧 조각에서 문학으로 옮겨지고 있었다. 문학은 필연으로 다가온 자아찾기의 방편이었다.

전업작가 생활로 들어서면서 문학에만 매달리자 글쓰기가 높은 산을 넘는 것처럼 힘겨웠다. 그즈음 기지촌을 배경으로한 소설을 쓰기 시작했는데 취재는 충분히 했으나 글이 도무지 나아가지 않았다. 나는 늪에 빠진 듯 했고 절망한 나머지 소설을 못쓰면 자살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이상하게도 객관적 거리감과 함께 여유가 생겼다. 죽음이라는 최후의 보루가 있다는 것이 힘이 되었다.

소설 하나 때문에 죽음까지 생각하다니. 그만큼 젊었고 그때는 문학이 삶의 전부였다. 문학으로 삶의 무의미와 싸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문학에 매달리지 않으면 반생의 내 삶에 어느새 침투한 허무주의에 쓰러질 것 같았다. 나는 이 허무의 근본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했다. 나도 한때는 보랏빛 꿈으로 사랑에서 구원을 찾기도 했지만 인간의 사랑은 허망하지 않은가. 인간 자체가 늘 변하므로 감정은 변덕스런 바람일 뿐. 우리가 찾아다니는 사랑도 본질적인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추구하는 부도 본질과는 거리가 멀다. 끼니 걱정을 했던 50년대 말에도 자가용을 탔던 유년은 풍족했지만 나는 지금도 자개농이 늘어선 방에서 맴돌던 공허의 냄새를 기억한다. 뒷날 생각하니 그것은 행복과도 무관한 물질의 공허였다.

이렇듯 공허한 것들은 비본질적인 것이다. 나는 비본질적인 것에서 등돌리고 문학으로 삶의 본질에 다가가고 나의 본질에 다가가려 했다. 자아찾기란 다름 아닌 나의 본질에 다가가는 과정이다.

'본질에 다가가기'를 위한 모색으로 나는 두 가지 주제를 나의 문학적 화두로 삼았다. 예술가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에서 나를 탐구하고, 또 하나는 제도에 상처받은 인물들을 통해 완고한 인습과 제도가 얼마나 우리 삶을 억압하며 비인간적인가를 고발하면서 그 모체인 한국사회를 탐구하려 했다.

1989년도에 인도를 여행했던 일이 떠오른다. 사막지대인 라자스탄에서 사파리 투어를 했는데 다른 참가자들과 함께 사막에서 잠을 잤다. 여행자로부터 별이 쏟아지는 사막의 밤하늘에 대해 이미 들은지라 기대에 찼지만 별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누워서 밤하늘을 올려다 보니 광대무변한 우주가 펼쳐진 듯 했고 나는 우주의 한가운데 있는 것 같았다. 난생 처음 보는 신세계 앞에서 나의 자아도 해체되었지만 그 작은 반도에서 상처만 받고 살았구나, 불현듯 생각했다. 내가 받은 고통은 본질과 무관한 것이 아니던가. 나는 사막의 밤하늘 아래서 고통의 낭비를 깨닫고 억울해했다.

내가 생각하기에 많은 작가들은 자신의 상처를 문학의 화두로 삼고 있다. 그 상처를 푸는 방법으로 문학을 택한 것 같다. 분단 현실로 가족이 상처받은 작가는 끊임없이 분단소설을 쓰고 아버지의 부재도 번번히 작품에 등장한다. 사랑에 상처받은 자의 시엔 사랑과의 투쟁이 되풀이해 그려진다. 그래서 문학을 패자의 기록이라 말하는지 모르지만 작가의 상처 혹은 작중 인물의 상처는 곧 그 사회의 단면이므로 작가들은 상처를 추적하면서 그들이 속한 사회의 왜곡된 면이나 인생의 환부를 열어젖힌다. 그래서 보들레르는 이렇게 기도했다.

"신이여, 지켜보기에는 너무나 역겨운 상처의 밑바닥까지 응시할 수 있는 힘을 주소서."

대중의 무감각한 일상―본질에서 먼―을 비트는 작가의 이 '온순한 복수'는 물론 보다 인간다운 세계를 위한 것이다. 하여 문학은 궁극적으로 휴머니즘이다. 권력이든 제도든 인간을 억압하는 모든 것은 폭력이니, 문학은 진정한 삶을 방해하는 비본질적인 것들을 벗겨내면서 인간을 자유롭게 하고 해방에 기여하는 것이 아닐까. 내가 소설 속에서 크게든 작게든 구원의 문제를 다루었던 것은 이러한 억압적인 인생의 조건으로부터 벗어나 본질에 다가가려는 자유정신에서다.

내가 사는 천년 고도 경주에는 수백 개의 고분들이 있다. 도심 한가운데 작은 산처럼 솟아있는 1,500년의 거대 고분들은 죽음이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임을 가르쳐주는 듯하다. 태고로부터 강물처럼 흘러온 세월 속에 생성과 소멸이 되풀이되는 인류의 삶. 희로애락 속에 발버둥치다가 나도 너도 풀잎처럼 스러지고 저렇게 생명이 순환하는구나, 생각하면 이 단순한 삶의 법칙 앞에 구원의 한 자락을 보는 듯하다. 경주의 고분들은 삶의 원형을 보여주고 한 장의 풍경으로 본질을 말해주는데 왜 나는 밤을 지새우며 광대처럼 수많은 인물들을 조정하고 보상도 없는 소설을 쓰는 것일까.

인도에서 체류할 때다. 내가 잠시 머물렀던 바라나시 힌두대학 교정에 인도 전통의학 체계인 아유르베다에 쓰이는 약초들이 심어져 있었다. 그것을 보고 나는 인간의 영적 진화에 있어 기초가 되는 육체의 치료로서 아유르베다를 공부하여 사람들을 치료해주고 나무 그늘 아래서 살까, 생각한 적이 있다. 정말 인생을 바꾸고 싶었다.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한국 사회 곳곳에 배치돼있는 정신적 독재자들, 완고한 가부장제, 여성들조차 한몫 하는 배타적이고 이기적으로 왜곡된 가족주의를 생각하면 여성작가로서 나의 문학작업이 바위에 달걀치기 같은 헛된 것으로 느껴졌다.

그때 과감하게 인도전통의학을 시작했더라면, 십년이면 산천도 변한다는데 죄를 씻듯 수도하듯 공부했더라면 지금쯤은 인도에서 가난한 자들을 치료해주고 약초를 키우며 살아갈 텐데. 그것이 문학보다 더 보람되지 않을까? 나는 왜 문학을 버리지 못했을까? 명예욕이 강한 작가는 자신이 없으면 한국문학사에 공백이 생긴다고 확신하지만 나는 결코 그런 망상을 하지 않는다. 인도 여행 후 '모든 집착은 미개한 것'임을 깨닫고 내 존재의 기반인 문학까지 포기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내가 언어로 돌아오고 만 것은 그것이 본질인 영혼을 탐색하는 최적의 보루임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기술을 연마한다면 누구나 육체의 치료사가 될 수 있지만 작가는 상처에서 진주를 캐내는 정신의 의사가 아닌가.

● 연보

1951년 대구 출생

1974년 이화여대 조소과 졸업

1974년 '문학사상'에 단편 '근(根)' '오픈게임'이 추천 등단

작품집 '밤과 요람' '숲 속의 방' 장편 '순례자의 노래' '청색시대' '가까운 골짜기' '세상의 별은 다, 라사에 뜬다' '내 안의 깊은 계단' 산문집 '인도기행' '일하는 예술가들' '능으로 가는 길' 등

녹원문학상(1986) 오늘의작가상(1986) 이수문학상(2001)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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