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겨울은 어떻게 날까." "내년 봄에는 다시 농사를 지을 수 있을까." 태풍 '루사'가 한반도를 휩쓸고 지나간 지 한 달이 지났지만 수재민들의 시름은 여전하다. 그동안 온정의 손길과 자원봉사의 발길 덕분에 도로와 교량, 하천과 제방 등에 대한 응급복구는 어느 정도 마무리 단계인 상태. 그러나 정작 수재민들에게 가장 시급한 주택문제와 생계를 위한 보상금 문제는 해결의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주택복구 늦어져 겨우살이 걱정
경북 김천시 봉산면 주민 박성두(53)씨는 지난달 30일 부서진 집 앞에 주저 앉아 한숨만 쉬고 있었다. 박씨는 "아직 부서진 집들도 철거를 못하고 있는데 어느 세월에 터를 다지고 집을 짓느냐"며 "이번 겨울은 꼼짝없이 컨테이너 안에서 버텨야 할 것 같다"고 하소연했다.
주택 513동이 전·반파된 김천지역 대부분도 사정은 마찬가지. 이제서야 주택복구를 위한 서류준비 작업에 들어가 상당수가 올 겨울에도 컨테이너 신세를 면치 못할 형편이다.
마을 전체가 수장됐던 충북 영동읍 예전리 33가구, 80여 명의 주민들은 한 달이 지나도록 가옥 철거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주민 대부분이 70대 이상 노인들로 복구 인력이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장 김진보(51)씨는 "장비도, 인력도 없고 설계를 해주겠다던 군청의 연락도 없어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다"며 "내년 봄이나 착공을 할 수 있을 지 모르겠다"고 답답해 했다.
임시컨테이너에 거주하는 강원도내 1,500여 가구 수재민들도 지지부진한 복구작업으로 겨우살이 걱정이 태산이다.
수재민들은 주택건축의 진행속도에 따라 단계별로 지원금을 지급하는 현행 방식이 작업을 더디게 하는 요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강원 삼척시 미로면 정연희(43)씨는 "모든 것을 다 잃어 당장 공사를 시작할 돈이 없는데 어떻게 단계별로 지원금을 요청할 수 있겠느냐"며 "우선 일정한 착수금을 지급하는 것이 순서"라고 주장했다.
강릉시청 건설과 직원은 "주택복구에 필요한 전문인력이 20% 수준에 불과해 인력확보가 시급하다"며 "더욱이 수해지역으로 건설업체들이 몰리고 있지만 대형 공사수주를 노릴 뿐이지 주택건축은 꺼리고 있다"고 말했다.
▶보상 둘러싼 불만 팽배
충북 영동군 심천면 초강리 공영길(48)씨는 사과밭 4,000평이 유실됐으나 고작 200만원을 보상 받는다. 공씨는 "12년생 사과나무 1,500여 그루를 못쓰게 돼 4억원 이상의 피해를 봤는데 200만원 남짓한 묘목 값으로 뭘 어쩌란 말이냐"며 "더구나 과수재배는 한번 피해를 입으면 3∼5년은 수입이 없는데 이에 대한 대책도 없다"고 울먹였다.
정부가 전국의 수해지역 모두를 특별재해지역으로 지정해 지원을 해주겠다고 밝혔지만 수해지역 곳곳에서는 보상을 둘러싼 마찰이 끊이지 않고 있다.
과수밭 3,300㏊ 가운데 22%인 717㏊가 유실·매몰되는 피해가 발생한 충북 영동지역에서는 작목별 특성을 무시하고 피해 면적에 따라 보상비를 정한 정부 대책에 집단 반발할 움직임까지 보이고 있다.
감천 범람으로 침수피해를 입었던 경북 김천시 양금동 황금시장 상인들은 다른 상가와 달리 보상대상서 제외돼 있어 "보상 대상 선정 기준이 무엇이냐"며 시에 항의하고 있다. 상인 박정옥(朴正玉·44)씨는 "똑 같은 피해를 입었는데 우리 상가는 피해보상서 왜 제외되는 지 이해할 수 없다"고 따졌다.
/영동=한덕동기자ddhan@hk.co.kr
김천=전준호기자 jhjun@hk.co.kr
강릉=김기철기자kimin@hk.co.kr
■ 강릉시 장현마을
"농사꾼은 가을에 수확하는 재미로 사는데…." 한달 전 수해 때 마을 뒷편의 장현저수지가 무너지는 바람에 마을 전체가 물에 잠기는 피해를 본 강원 강릉시 장현동 주민 신명수(申明洙·87) 할아버지는 쓰레기 야적장처럼 변한 논 위에서 가을걷이가 한창인 건넛마을의 들녘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연신 담배만 피워댔다. 신 할아버지는 "4,000평의 논밭에 농사를 지어 거둬들인 것은 고추 6㎏이 전부"라며 허탈하게 웃었다.
수해로 집을 잃어 컨테이너에서 살고 있는 이부선(73) 할머니는 "컨테이너에서 지내느라 마을 노인들 절반이 감기에 걸렸다"며 "복구공사가 더뎌 겨울이 오기 전에 새집으로 이사할 꿈은 진작에 버렸다"고 말했다. 이 할머니는 "당장 이번 겨울을 컨테이너에서 어떻게 보낼 지가 겁난다"며 이제는 눈물도 말라버린 눈자위를 훔쳤다.
태풍의 휩쓸고 간 지 한 달이 지났지만 지난달 30일 찾아간 강릉시 장현동은 수해로 허리가 잘려나간 저수지 둑, 물에 휩쓸려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집과 전답 등 여전히 참혹했던 수해 당시 상황 그대로였다.
그 동안의 변화라곤 폐허로 변한 마을 한 켠에 난민촌처럼 다닥다닥 들어선 26채의 컨테이너 집들뿐이었다.
가장 바빠야 할 수확철이지만 거둬들일 쌀 한 톨 남지 않은 장현마을은 가장 한가로운 가을을 보내고 있다. 추수 대신 수해복구에 땀을 흘려야 하는 상황이지만 주민들은 이미 의욕마저 잃어버린 듯했다.
장현동 4통장 박보근(42)씨는 "자원봉사자들과 군인들로 마을이 북적일 때는 주민들도 활기를 되찾았는데 응급복구를 마치고 그들도 떠나버리자 마을사람들도 손을 놓아버린 것 같다"고 전했다. 그는 "이러다가 마을 사람들이 농사마저 접어 버리지 않을까 걱정된다"고 말했다.
장현동 사람들이 농사일을 포기하고 있다는 징후는 곳곳에서 보인다. 객지에서 직장생활을 하다 2년 전 정년퇴임 후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농사를 짓고 있는 최종대(崔鍾大·63)씨는 "이번 수해로 다시 고향을 등져야만 할 것 같다"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강릉=김기철기자
● 한달째 자원봉사 박종대씨
"굴삭기는 어디 갔어. 김씨 장비 챙겨."
그 많던 자원봉사자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강원 강릉시 주문진읍 장덕2리. 자원봉사자 박종대(朴鍾大·47·사진·춘천시 효자동)씨는 구슬땀을 흘리며 현장지휘에 여념이 없었다.
"무작정 집을 나섰죠. 도중에 길이 끊겨 트랙터까지 얻어 탔어요." 지난달 2일 열흘을 생각하고 나선 길이 벌써 한 달이다. "폭격을 맞은 것처럼 망가진 마을을 보고 막막합디다. 집을 덮친 흙더미를 치우고 나니 제방을 쌓고 보일러도 고쳐야 하고… 일은 많고 사람은 없어 떠날 수가 없더라구요."
박씨 등 자원 봉사자들의 활약으로 마을은 빠르게 안정을 되찾고 있다. 끊긴 길과 다리를 다시 잇고 둑을 쌓아 마을의 형태를 만들고 있다.
수해 현장을 누구보다 잘 아는 터라 복구 작업의 현장 지휘까지 맡아 박씨의 일은 더 늘었다. "잠을 못 자는 게 고역이죠. 곳곳에 인력 배치하고 자정께 복구 작업이 끝나면 새벽길 달려 오는 자원 봉사자들 마중도 나가야 하구요."
"어르신들의 빠진 이빨 사이로 스미는 웃음을 보노라면 힘이 난다"는 박씨는 겨울이 오기 전에 외풍이라도 막을 수 있는 공동 세면장과 취사장을 만드는 게 소원이다.
박씨의 직업은 산악 등반 가이드. 백두대간을 종주한 베테랑이다. 가족들 안부를 묻자 심드렁하다. "집 잃고 논 잃은 노인네도 산다고 안간힘인데 한 두 달 벌이 못한다고 못 사나."
"많이 와서 도와달라"는 말을 남긴 박씨는 훌훌 털고 일어나 복구작업이 한창인 골짜기를 따라 사라졌다.
/강릉=고찬유기자 jutda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