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일이다. 병풍을 둘러싼 여야간의 공방이 아직 끝나지도 않았는데 이번에는 김대중 정부가 남북 정상회담을 위해 거액의 자금을 북한에 제공했다는 비밀거래설로 여야간에 사생결단식의 싸움이 시작됐다.이 같은 공방 속에서 우려되는 것은 공방도 공방이지만 여야가 정쟁을 위해 아무런 원칙이 없이 순전히 정략적 필요성에 의해 제 편리한대로 논리를 왜곡함으로써 이를 바라보는 국민들이 논리의 공황 상태와 도덕적 허무주의에 빠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논리의 정략적 왜곡 중에서 특히 두드러진 것은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스캔들"이라는 식의 이중 잣대이다. 사실 사안에 대해 여야가 이 같은 이중 잣대를 사용하고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것은 그 공방이 정략적인 것인가, 그렇지 않은 것인가를 구별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판단 기준이다.
이회창 한나라당 대통령후보의 아들 정연씨의 병역 의혹과 관련한 병풍만 해도 그렇다. 김대업씨가 이정연씨의 병역면제에 대한 병역비리 의혹을 제기하고 나섰을 때 한나라당은 김씨의 전과와 사기경력 등을 내세우며 이 같은 사람의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고 반발했다. 그러자 민주당은 김대업씨의 전력은 전력이고 문제는 사실이 무엇이냐는 것이라고 반박한 바 있다.
그런데 얼마 전 이번에는 한나라당이 거꾸로 김대업씨와 함께 복역을 했던 한 마약판매범이 김씨가 병역공작을 실토한 것을 들었다는 내용을 진술한 녹음테이프를 공개했다. 또 김대업씨가 함께 복역 중이던 또 다른 재소자인 수지김 살해 혐의범 윤태식씨에게 테이프 등 증거조작이 가능하다며 증거조작을 제의했다는 증언도 공개했다.
병역비리 의혹에 대해 범법자의 말을 어떻게 믿느냐고 길길이 뛰던 한나라당이 김대업씨를 공격하기 위해 범법자들의 증언을 들고 나오는 자기모순을 저지르고 만 것이다.
민주당도 크게 다르지 않다. 전과자의 말을 어찌 믿느냐는 한나라당에게 사실 여부가 중요한 것이라고 반박하던 민주당이 이번에는 태도를 표변해 "마약사범과 아내살해 혐의범의 말을 어떻게 믿느냐"는 한나라당식 논리를 펴고 나선 것이다. 이 처럼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스캔들"이라는 식으로 자신에게 유리하게 논리를 비틀어대는 정치권의 정쟁을 보고 있노라면 국민들은 논리의 공황 상태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이회창 후보 부친의 친일시비만 해도 그렇다. 북한이 이에 대한 자료를 공개한 것에 대해 민주당은 단서를 달면서도 그것이 사실이라면 큰 문제라는 식으로 대응을 하고 나섰다. 그러나 순수 가정으로 설사 이 후보 부친의 친일 주장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김대중 정부와 민주당은 이에 대해 왈가왈부할 자격이 전혀 없다. 정권 초기 김대중 정부는 영남권 진출을 위한 동진정책을 펴면서 그 일환으로 소위 TK(대구·경북)세력의 환심을 사기 위해 국고지원에 의한 박정희 기념관 설립을 추진한 바 있다. 이에 대해 역사학자, 시민단체들이 일본 육국사관학교를 자원 입대해 일본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등 친일 경력이 너무도 뚜렷한 박정희 전 대통령의 기념관을 국고 지원으로 짓는 것은 역사에 대한 모독이라며 결사반대 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와 민주당은 기념관 설립을 강행했다. 이처럼 본인이 친일을 한 박정희에 대해서는 기념관을 세워주자면서, 정적이라는 이유로 본인도 아닌 부친의 경력에 대해서 시비를 거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 즉 자신들의 정략적 필요성에 따라 친일파를 기념관을 세워줘야 할 존경의 대상으로 삼았다가, 비판의 대상으로 삼았다가 하는 것은 코미디에 다름 아니다.
이제 이 같은 정략적인 이중 잣대가 아니라 원칙과 원칙이 부딪치는 생산적인 정치공방을 보고 싶다. 더 이상 국민들을 논리의 공황상태나 도덕적 허무주의에 빠지게 해서는 안 된다.
손호철 서강대 정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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