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9월 17일 평양. 이 때와 장소가 북한이 변하기 시작한 기점으로 역사에 기록될 것인가. 이 날부터 거의 매일 신문과 방송뉴스를 장식하는 북한의 변화 시그널을 보면서 반추하는 상념이다.사상 첫 북일 정상회담이 열린 이 날 오전까지 바깥 세상에서는 그리 큰 관심을 갖지 않았다.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총리가 도착한 평양 순안공항 분위기는 썰렁하기만 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출영도 환영인파도 없는 것을 보고 "회담성과를 기대하기 어렵겠다"는 관측이 나왔다. 그 날 아침 노동신문은 고이즈미 방북기사를 1면 오른쪽 하단에 깔아 버렸고, 중앙방송 아침뉴스도 12개 아이템 중 10번째로 밀어 내렸던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였다. 김정일은 오후회담에서 일본인 납치사실을 인정하고, 사망자와 생존자 명단을 넘겨주었다. 대남공작을 위해 그랬다고 이유를 설명하면서 미안하다고 말했다. 많은 피납자들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일본측은 회담을 깨려다, 솔직한 태도에 놀라 마음을 바꾸었다 한다.
그로부터 이틀 뒤 북한이 신의주를 경제특구로 지정한다는 뉴스가 나왔다. 특구에 입법 사법 행정권을 위임하고, 50년간 토지 임대를 보장한다는 신의주 특구 기본법은 '상전벽해'란 말을 유행시킨 김정일의 상해방문 결실로 이해되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뉴스의 속보들이었다. 얼마나 빨리 변하는지 보여주려는 듯 매일 쏟아내는 속보 가운데, 외국인인 양빈(楊斌)을 신의주 특구 행정장관에 임명한 것은 상상의 한계를 뛰어 넘었다.
한껏 고조된 월드컵 열기를 한 순간에 얼어붙게 한 서해도발이 불과 3개월 여 전이다. 얼마 뒤 김정일의 유감표명이 있었지만 그걸 진심으로 본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변화의 속도를 상품화한 '김정일의 세일'이 아직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다. 그 화려한 변화 공세가 사람들을 감동시키지 못하는 이유는 주민이주와 장벽 때문이다.
양빈 장관은 회견을 통해 기존주민 20만명을 2년 내에 다른 지역으로 이주시키고, 내국인 출입을 철저히 막기 위해 장벽을 설치하겠다고 밝혔다. 주민이주는 이미 착수되었다는 보도도 있다. 사상적인 동요를 막기 위해 노동당원을 중심으로 한 성분 우량자들을 받아 들이기 시작했으며, 시가지 외곽지역과 용천군에 기존주민 이주단지를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밖으로는 문을 열고 안으로 장벽을 친다면 쪽문을 열고 대문을 걸어 잠그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개방초기의 중국보다 훨씬 과감하다는 평가도 이 점 때문에 빛이 바래고 만다. 1979년 중국 경제특구 제1호로 문을 연 선전(深쌭)은 그렇지 않았다. 호구관리를 철저히 해 외지인의 이주를 막았을 뿐, 강제이주는 없었다. 특구 내 기업 취업자에게는 이주를 허용, 특징 없던 변경도시가 700만 인구의 대도시가 됐다. 활력 넘치는 고학력 젊은이 도시다.
일본정부의 납치사건 진상조사단이 평양에서 활동 중이고, 부산 아시안 게임에 대규모 북한 선수단이 참가한 가운데, 모레는 부시 미국 대통령 특사가 서해항로를 이용해 북한을 방문한다. 핵사찰과 대량 살상무기 문제의 매듭이 풀릴지도 모른다는 전망이 제기되는 것도 북한의 변화 속도와 무관하지 않다. 일본과의 화해, 미국과의 관계개선은 꼭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더 급한 것이 남한 민중과의 화해라는 것을 김정일은 알아야 한다.
1953년 7·27 휴전 이후 50년간 북한이 저지른 수 많은 도발과 테러와 파괴공작에 관한 해명과 사과 없이 화해는 불가능하다. 잘못한 사람이 뉘우치지 않으면 친해질 수 없는 개인관계와 같은 이치다. 특히 피해당사자와 보수계층의 마음을 사지 못하면, 신의주 개방도 원맨 쇼가 되고 말 것이다.
문창재 논설위원실장 cjmo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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